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마인츠는 기원전 30년대부터 나폴레옹이 유럽으로 진격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1806년까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의 중심부였으며, 1793년에는 독일 최초로 시민혁명을 통한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선포하며 근대 시민국가의 이상을 독일 전역에 전파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마인츠(Mainz)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까지 2000년 가까이 유럽 역사의 중요 장면을 생생하게 내보이고 있는, 독일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이다.

이제 우리는 2000년의 도시 마인츠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보오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군사적 용도로 1884년 건설한 마인츠 중앙역을 출발해 중세의 1000년의 마인츠, 나폴레옹과 함께 맞는 격동의 19세기, 시민혁명과 프로이센으로의 병합에 따르는 마인츠 시민들의 영광과 좌절의 그 현장으로 함께 떠나보자.

실러 동상에서 마인츠공화국을 생각하다

이제 우리는 대저택들 가운데 자리 잡은 Schiller Platz의 주인공 실러 동상 앞에 서 있다.

실러가 독일 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대단하다. 독일의 자존심 괴테와도 쌍벽을 이룰 정도로 독일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독일 문학사에 있어 최고의 역사적이고 극적인 사건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둘의 만남을 통해 독일 고전주위가 완성되며, 독일 문학계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고, 실러 동상 옆이나, 인근에는 늘 괴테 동상이 함께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인츠에서는 괴테 동상을 찾아볼 수 없다. 왜일까? 인근 프랑크푸르트와 비스바덴에도 실러와 괴테의 동상은 그린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인츠에서는 괴테의 동상은 왜 없는 것일까? 정확한 이유야 마인츠 시 당국자 또는 문화단체 소관일지라도, 아마도 독일 최초의 시민혁명인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17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대혁명은 말 그대로 천지개벽적인 사건이었다. 천년 이상을 내려온 신분제 사회가 한순간 타파되고,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며 모두가 평등한 시민사회가 어느 날 갑자기 성립된 것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 왕권도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처형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는 다른 유럽 제후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으며, 그들은 혁명의 불길이 프랑스로 넘어 자신들의 영토에 퍼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그 귀추를 살피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지 4년 뒤인 1793년, 마침내 시민혁명의 열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대륙 전역으로 번지게 되었고, 마인츠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마인츠 선제후는 도피의 길에 오르고, 시민들은 1793년 3월 17일 오늘날 라인란트-팔츠 주 의회 청사로 쓰이는 Deutschhaus에서 마인츠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시민들의 움직임에 당황한 유럽 대륙의 제후들은 긴급히 회의를 열고, 마인츠시민혁명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하였다. 괴테가 활동하던 바이마르가 포함된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도 이 연합군에 참여하게 되는데, 괴테는 이 연합군의 고위 지휘 장교로 참가하게 되며 마인츠와 불운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연합군은 4월 14일부터 45,000여 병력으로 마인츠를 봉쇄한 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마인츠를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마인츠 탈환에 실패, 결국 연합군은 6월 17일 대대적인 포격전을 펼쳤고, 마인츠 공화국은 7월 23일 연합국이 제안한 항복문서에 조인하게 된다.

괴테는 30년 가까이 지난 훗날(1820년-1822년) 마인츠 공화국 봉쇄(Belagerung von Mainz)에 대한 기록을 일기형태로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7월 7일에서 멈추었다.

한편 전쟁 당시 그의 친구인 Friedrich Heinrich Jacobi에 보낸 편지에서 괴테는 “당시 발생한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함구하여야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 연합군이 시민들을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에 대해 그저 추축만을 할 수 밖에 없다.

마인츠공화국의 해체이후 마인츠는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선제후는 마인츠로 돌아오지 않았고, 수년 뒤인 1800년대 초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해체에 따라 마인츠는 선제후국의 지위도 상실, 프랑스 변경의 한 주(donersberg)의 주도로 전락하며, 1000년 동안 유럽을 호령하였던 마인츠는 이렇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인츠공화국의 해체로부터 시작된 마인츠의 몰락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당시 연합군의 지휘 장교로 참전하여 마인츠 점령에 앞장선 한 괴테, 그리고 그 실상조차 정확히 밝히지도 못한 괴테는 과여 어떤 존재였을까?

한국 현대사나, 여러 나라의 유사한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마인츠 시민들에게 괴테는 결코 위대한 문학가로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괴테 역시 이후 마인츠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고,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와 비스바덴을 방문하였어도, 마인츠에는 이후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괴테에게도 마인츠는 두고두고 아픈 기억이 되었던 것만을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끝으로 마인츠 공화국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는 점을 소개하고 실러 동상을 떠나려 한다.

독일 최초의 시민혁명의 결과물인 마인츠공화국을, 일본군의 보호 하에 세워진 만주국, 독일군 치하의 프라스 비시정부와 같이 프랑스군 비호하의 설립된 프랑스의 ‘괴뢰정부’에 불가하다는 라는 비판을 오랜 동안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3년 3월 마인츠 공화국 220주년 기념식이 전독일 차원에서 치러졌으며, 라인란트 팔츠 주청사 앞 광장이 마인츠공화국 광장(Platz der Mainzer Republik)으로 명명되면서 오랜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마인츠와 쾰른의 미묘한 경쟁

실러 동상에서 Osteiner Hof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좌우로 마인츠 카니발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을 만날 수 있다. 1967년 완공된 것으로 오래된 조형물은 아니지만 마인츠 카니발을 상징하고 있다.

독일의 카니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쾰른(Köln)과 마인츠로 “장미의 월요일((Rose Montag)”에 양 도시에서 펼쳐지는 시가행진은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될 정도로 역사와 그 규모에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마인츠와 쾰른 두 도시는 예민하게 서로에게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 도시가 더 오래되었는가?”, “쾰른 돔과 마인츠 돔 가운데 어느 돔이 더 큰가?” 또는 “어느 카니발이 규모나 역사에서 더 중요한가?” 등 라인강 상, 하류의 두 도시는 매사를 비교하며 지신의 비교우위를 자랑하고 있다. 독자들께서는 사료, 또는 자료를 살펴보며 각자의 해답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이제 우리는 지난 호에서 살펴본 오누이의 대저택인 OsteinerHof와 Bassenheimer Hof 사이로 난 언덕길 Gaustrasse를 따라 성 슈테판교회(St. Stephan Kirche)로 가본다.

샤갈의 창문으로 유명한 St. Stephan Kirche: 독일인과 유대인의 화해

슈테판교회는 990년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화재로 인한 재건, 개축을 통한 건축양식의 변화 수차례 재건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띠며 1000년 이상을 Stephan 언덕을 지키고 있다.

매년 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마인츠에서도 매우 잘 알려진 관광의 명소 슈테판 성당에. 이렇게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은 1000년 교회 슈테판교회의 역사성과 무게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파란색으로 유명한 “샤갈의 창문(Chagall-Fenster)”을 직접 보려오는 사람들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

오전 11시경 슈테판교회 내부에서 샤갈의 창문을 바라보면, 햇빛을 통과시키는 파란색의 아름다움은 가히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마인츠 시에서도 샤갈의 유리창을 “마인츠의 파란색의 기적(Das blaue Wunder von Mainz)” 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파란색의 기적”은 단순히 미학적 아름다움만을 뜻하고 있지 않다. “독일과 유대인의 화해”, 나아가서는 “가톨릭과 유대교의 화해”의 의미도 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샤갈의 창문은 슈테판성당의 마이어(Klaus Mayer)몬시뇰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슈테판성당의 주임신부로 재직 시인 1973년 마이어 신부는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채색 창문화로 명성이 높은 샤갈(Marc Chagalls)에게 “990년에 지어진 슈테판성당이 전쟁으로 많이 손상되어 새로운 교회 채색창문이 필요하고 이를 샤갈 당신께서 꼭 맡아주기를 간곡하게 청한다는” 정중하면서도 간곡한 편지를 쓴다. 그러나 샤갈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샤갈이 누구인가? 당시 남프랑스에 거주하던 샤갈은 러시아 제국(현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2차 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게 자행된 끔찍한 만행을 생각해 볼 때, 더욱이 지신의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타락한 작품”으로 낙인찍히고, 배격 당하였음을 생각해 볼 때, 샤갈의 단호하고 분노에 찬 거부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이어 신부는 실망하지 않고 서한을 통해, 꾸준히 샤갈을 설득하였다. 마이어신부는 샤갈의 작품을 슈테판 성당에 설치하는 것을 통해 독일인과 유대인의 화해, 더 나아가서는 유대인 박해에 침묵하였던 가톨릭과 유대교의 화해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3년이 지난 뒤인 1976 샤갈은 마이어신부의 정성에 그의 의지를 접고 슈테판 성당 채색창문 작업에 들어가고, 샤갈이 91세인 1978년 9월 23일 그의 첫 작품 “ Vision vom Gott der Väter” 슈테판성당에 도착했다. 이어 샤갈은 1985년까지 총 9장의 대형 채색창문을 제작하였는데, 그가 9번째 창문을 완성하고 얼마 뒤 만98세를 몇 달 앞둔 1985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샤갈은 89세부터 98세 직전까지 그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 시기를 독일과 유대인, 가톨릭과 유대교 이 두 민족, 두 종교 간의 화해의 작품을 슈테판성당에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샤갈의 분노는 매우 깊었는지, 2차 대전 이후 한 번도 독일을 방문하지 않았었고, 1981년 마인츠 시에서 명예시민으로 추대하였음에도 그는 결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슈테판 성당은 중세 천년, 유럽을 호령하였던 마인츠의 영화가 빌리기스(Willgis) 대주교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샤갈의 창문을 감상한 뒤, 슈테판 성당 계단에 앉아 마인츠 1000년을 설계한 빌리기스 대주교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1189호 20-21면, 2020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