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4)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Willigis 마인츠 1000년을 설계하다.

마인츠 시는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한 구텐베르크(Gutenberg)를 마인츠 대표 인물로 선정하였다. 그래서 마인츠 대학의 공식이름도 Johannes Gutenberg Uni로 정했으며, 마인츠 국립극장 앞에도 구텐베르크 동상을 건립하는 등 시 차원에서 마인츠를 기리고 있다.

이는 금속활자의 발명이 인쇄물의 발전, 그를 통해 성서 및 일반 지식의 대중화에 이바지 한,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꾼 혁명적인 결과를 수반하였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마인츠 인(人)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러나 마인츠로 국한해서 볼 때는 구텐베르크보다는 그보다 500년 가까이 앞선 빌리기스(Willigis)대주교야말로 마인츠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가 있다.

Willigis는 975년 마인츠 대주교로 부임한 이래, 마인츠 돔 건축을 비롯, 종교계분만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에서도 마인츠를 유럽의 중심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Willigis의 영향력은 마인츠에서는 멀리 떨어진 바이에른 북단의 Aschaffenburg의 가장 오래된 다리 이름이 Willgis Brücke이고, Oberursel/Ts 시의 Marktplatz의 여신상에 마인츠의 상징물인 마인츠 바퀴(Mainzer Rad)가 조각되어 있으며, Königstein/Ts이나 Kronberg/Ts에서도 Willgis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 Willigis 35세의 나이로 마인츠에 입성하다

Willigis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940년 오늘날 니더작센주 Schöningen에서 평민의 자녀로 태어난 Willigis는 그 총명함을 어릴 때부터 빛을 발해 마이센주교에 의해 발탁되어, 교육과 관직을 통해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된다.

971년 약관인 31세, 당시에도 파격적으로 Otto II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총리에 임명되었으며, 975년 마인츠주교관구 책임자인 마인츠주교로 임명되어 마인츠에 입성하게 된다.

이로서 Willigis는 마인츠와 인연을 맺게 되며 그가 사망한 1011년까지 36년 동안 마인츠를 다스리며, 마인츠를 유럽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여러 황제의 즉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Willigis는 당대인으로부터 “신성로마황제들과 제국의 아버지(des Kaisers und des Reiches Vater)라고 칭해질 정도로 신성로마제국의 국부와도 같은 중심인물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Willigis 사후 800년의 마인츠 역사는 Willigis가 예비한 역사이며, Willigis를 떼어놓은 중세 1000년의 마인츠는 허상에 불가할 정도이다.

마인츠와 Heilige Stuhl

Heilige Stuhl(성좌, 라틴어로는 Sancta Sedes)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의자”로 로마주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베드로이후로부터는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Heilige Stuhl은 바티칸의 Franziskus 교황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치편의상 몇 지역에 Heilige Stuhl을 설치하였는데, 로마 이외에는 초대교회와 로마시대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Alexandria, Antiochia(우리에게 안디옥으로 알려진), Jerusalem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면서, 이슬람의 정복, 동서교회의 분열 등으로 Alexandria, Antiochia, Jerusalem의 Heilige Stuhl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이제 Willigis 통치하의 마인츠가 맡게 된 것이다,

Willigis에 의해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마인츠에 Heilige Stuhl이 설치되어, 교황권을 대행할 수 있는 주교관구로 우뚝 선 마인츠는 이후 신성로마황제 대관식, 십자군의 출발지, 제국의회의 회의장소 등으로 유럽 가톨릭의 중심지로 확고한 위상을 다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위상으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초래한 면죄부 판매도 당시 마인츠 대주교인 Albrecht 대주교에 의해 촉발된 아픔도 지니고 있다.

– St. Stephan KircheWilligis

975년 마인츠주교에 취임한 Willgis는 마인츠 돔(Dom)을 신축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마인츠 돔은 그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오늘날의 Johannis Kirche) Willigis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의 돔을 짓기로 결심하고 이를 시행한 것이다.

Willigis는 이와 더불어 마인츠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또 다른 교회를 짓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St. Stephan Kirche이다.

슈테판 성당은 990년 지어지게 되는데, 애초 목조건물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전소되고, 다시 석조 건물로 지어지고, 수차례 증,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Stephan은 성인의 이름도 되지만, 고대희랍어로는 “Στέφανος”로 “Kranz”, “Krone”로 번역된다. 즉 슈테판성당은 마인츠의 화관이자 제국의 화관으로 지어진 것인데, 여기에는 자신을 발탁한 Otto II세에 대한 경의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슈테판성당 앞에 현대식 건물이 있어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마인츠 시내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이라 Willigis는 이곳에서 마인츠의 1000년을 설계하였을 것이다.

Willigis는 자신이 죽을 때, 주교는 자신이 집전하는 성당에 안치되는 전례를 거부하고, 슈테판성당에 안치되길 원했다. 아마도 언덕위에서 앞으로 펼쳐질 마인츠 1000년의 영화를 직적 바라보고 싶었건 것은 아니었나 싶다.

마치 신라 문무왕이 감포에 자신의 수중묘를 짓게 해,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그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1190호 20면, 2020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