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5)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마인츠는 기원전 30년대부터 나폴레옹이 유럽으로 진격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1806년까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의 중심부였으며, 1793년에는 독일 최초로 시민혁명을 통한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선포하며 근대 시민국가의 이상을 독일 전역에 전파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마인츠(Mainz)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까지 2000년 가까이 유럽 역사의 중요 장면을 생생하게 내보이고 있는, 독일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이다.

마인츠 대성당(Dom)을 향해서

이제 우리는 St. Stephan kirche를 떠나 중세 천년 마인츠의 중심지인 마인츠 대성당을 찾아 떠난다. St. Stephan kirche에서 오던 길로 되돌아 시내로 가는 길도 있지만, St. Stephan kirche 옆의 돌계단으로 내려가 시내로 가는 길이 한층 더 운치가 있다.

돌계단을 내려가면 빌리기스 대주교를 기리는 Willigis Platz와 Willigis Gyimnasium이 나온다. 계속 직진하며 큰 도로(Weissliliengasse)가 나오고 그 도로를 건너 시내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Weihergarten 길이 나오고, 오른 편으로 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가 마인츠 주교청과 주교관저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관공서와 같은 분위기를 내보이고 있지만, 중세 1000년 동안 유럽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주교들이 가톨릭의 부침을 직접 감당해 온 곳이기에, 건물 하나하나와 거리의 기념 조각 등을 보면 역사의 무게감을 느낄 수가 있다.

Bischofsplatz에서 Johannisstrasse를 찾은 다음 그 길을 따라 50m 정도 가다보면 왼 편으로 Johannis Kirche가 나타난다. 지금은 장기간 수리중이라 전모를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꼭 보아야 하는 유적이다.

Johannis Kirche는 마인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대략 8세기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마인츠 대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마인츠 주교가 집전하는 마인츠 Dom의 역할을 하는 성당으로 초기 유럽 가톨릭의 산 증인이기도 한 성당이다. 마인츠 대성당이 완공된 후 그 의미는 작아졌지만, 마인츠 교구를 개척하고, 유럽 선교에 큰 이름을 남긴 Bonifatius 성인이 집전한 성당이기도 하다,

마인츠 구 시가지와 Kirschgarten

Johannis Kirche에서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1400년대부터 이어온 마인츠의 구 시가지가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유서 깊은 독일 도시의 구시가지는 말과 마차가 잘 다닐 수 있게 바닥을 돌조각을 깊게 박아서 포장한 도로로, 로마시대의 도로형태를 띠고 있다.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도로이기에 어떤 도시에는 돌 조각 바닥을 모자이크 그림으로 장식한 곳도 있다.

마인츠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독일 중세의 특징적인 가옥 형태, 즉 Fachwerkhaus가 나타난다. Fachwerkhaus는 목조로 기둥과 중요 지지대등 뼈대를 세우고, 사이를 진흙과 벽돌로 채우는 방식을 사용한 건축물이다. Fachwerkhaus들을 지탱하는 대들보가 벽 밖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창문이 많고 내부는 거의 나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마인츠에서는 구 시가지 오른편에 광장 형식의 Kirschgarten에서 이 Fachwerkhaus들을 잘 살펴볼 수 있다.

Kirschgarten은 1329년의 사료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700년 이상 된 광장으로 “Zum Aschaffenberg” 건물은 이 광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450년에 지어졌다.

Kirschgarten에서 구시가지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는 내부 장식이 로코코 양식으로 매우 화려한 Augustiner 성당과 오른편에는 마인츠 시민혁명의 성지인 Frankfurter Hof가 나타난다. 시간을 많이 갖고 나선 이들은 이 두 곳도 꼭 관람해 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특히 Augustiner 성당 지하의 Augustiner Keller 식당에서는 독일 전통 음식을 최고의 맛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Augustiner 성당에서 약 50m 정도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오른편으로 나오는 Grebenstraase로 들어가 보자. 이제 마인츠 대성당은 지척으로 Grebenstraase를 따라 300m 정도 가면 왼편으로 Domstrasse가 나오면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NagelsäuleDomstrasse를 따라 걸으면 마인츠 대성당 뒷광장(Liebfrauenplatz)과 만나고, 정면에 못으로 뒤덮인 Nagelsäule(못기둥)이 나타난다.

Nagelsäule는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산물이다. 연합군의 독일 봉쇄로 전황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국내 상황도 열악해져 일반 시민들의 삶은 식료품의 배급제 등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Mannheim, Berlin, Köln, Aachen 등 여러 도시들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이를 타개하려고 하였고 이에 마인츠 그 일환으로 모금을 상징하는 나무 기둥을 설치하게 된다.

당시 마인츠 시장인 Karl Göttelman 시장은 1916년 7월 1일 7m 높이의 참나무 기둥과 그 주변에 조각으로 장식된 3개의 돌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이 나무기둥에 “모금의 못”을 박는 것을 모금행사를 벌였다. 작은 못은 50페니히(제국화폐), 금박 입힌 못은 20마르크로, 당시 헤센공국의 대공이었던 Ernst Ludwig 대공 가족이 첫 번째 성금 기부자로 이 기둥에 못을 치는 것으로 모금 행사는 시작되었다. 1916년 8월 20일까지 진행된 모금 행사에서는 총 170.000 마르크가 모아졌는데,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800.000 유로에 해당되는 액수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재단장을 마친 뒤 2011년 현 위치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많은 참가자들은 1차 대전 당시인데 어떻게 나치의 상징인 철십자 조각이 기둥 위에 장식되어 있는지 의아함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철십자가 나치의 상징이라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철십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 군의 상징으로 보불전쟁 당시 빌헬름 1세는 철십자 상을 제정하였으며, 이후 독일 군대의 상징이자, 독일 최고의 훈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Marktbrunnen

Nagelsäule에서 라인강 편으로 조금 가다보면 왼쪽으로 Gutenberg 박물관이 보인다. 이 박물관은 Gutenberg의 금속활자를 유럽에서 최초로 발명한 것을 기려 세운 박물관이다. 2층에는 한국실도 있고, 유럽 이외에 약 200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Nagelsäule에서 라인강 반대쪽에 있는 마인츠대성당 앞 광장(Marktplatz)로 이동한다. 광장에 들어서면 화려한 채색으로 단장된 Marktbrunnen이 눈에 들어온다.

Brunnen은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샘물이나 우물, 또는 분수로 번역된다, 중세 시대에는 깨끗한 물을 제공하기 위한 공공시설로 설치되어 공공수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곳 광장의 Marktbrunnen은 르네상스식 Brunnen으로는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데,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후의 농민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마인츠 주교이자 세속 통치자이기도 한 Albrecht von Brandenburg은 1526년 마인츠 시민들을 위해 Marktbrunnen을 오늘의 자리에 건설하였다.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것은 당시 영주들에게는 가장 큰 공공사업의 하나이자, 오늘날 사회 복지 시설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 Albrecht 대주교는 왜 이 Brunnen을 건설했을까?

우리는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은 면죄부판매였다. 면죄부(免罪符, Indulgentia)는 천주교에서 교황이 지닌 일종의 사면권을 수여받았다는 증명서를 의미한다. 면죄부는 이미 용서받은 죄에 따른 벌, 즉 잠벌(暫罰)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행하는 속죄인 보속을 치루어야 하는데, 이를 일부 또는 전부를 감면해주는 은사의 증명서를 말한다.

루터 시기인 16세기 천주교에서 로마의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교황청이 대량으로 판매하여 비리가 발생해 종교 개혁 운동의 중요 요인이 된 것이다. 알프스 이북에 교황청을 대신하는 Heilige Stuhl이 설치된 마인츠 교구가 유럽에서 면죄부 판매를 집행하게 되고 그 주인공이 바로 Albrecht 대주교이다.

종교개혁의 후속 물결로 농민전쟁이 일어나는데, 1524년부터 1525년 사이 유럽의 독일어 권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농민들의 항쟁으로 30만여 명의 가난한 소작농 가운데 10만여 명이 귀족들에게 학살되며 진압되었다.

이러한 농민전쟁은 마인츠에서도 일어나게 되고, Albrecht 대주교도 피난을 떠날 정도로 그 정도가 심했으며, 따라서 진압과정도 매우 과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겪은 Albrecht 대주교는 동요한 시민들과 자신의 통치기반을 안정화 하려는 일환으로 Marktbrunnen을 건설하여, 시민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Marktbrunnen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세의 전형적인 계급제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가장 위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그 밑에는 주교 등 고위 성직자가 조각되어 있으며, 맨 하단에는 일반인들이 술 취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Albrecht 대주교의 뜻은 명확했다. 당시 시대의 규범, 즉 신분제를 다시 한 번 일반인들에게 각인시키고, 자신은 이들을 위해 큰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을 과시하는 이른바 위민정치를 가장한 전형적인 체제수호 정치의 상징물을 설치한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때야 비로서 그 존재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Heunensäule

광장 정중앙에는 포도주 빛을 띤 돌기둥이 서있다. 바로 Heunensäule이다. Heunensäule의 나이는 이미 1000년이 넘었으나, 이곳에는 1975년에 세워졌으니 이제 45년 정도를 마인츠 시민과 함께 하고 있다. 여기에는 마인츠 대성당과 얽힌 사연이 있다.

마인츠 대성당이 건설되던 당시, 대형 공공건물 주변에 돌기둥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고, 이는 마인츠 대성당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연유로 마인츠 대성당을 위한 돌기둥이 Miltenberg에서 채굴, 세공되었다. 그러나 975년 건축에 들어간 마인츠대성당은 몇 차례 수정을 거쳐 1036년에 완공되었고, 완공된 마인츠 대성당은 그 규모가 당대 최대였기에, 7m의 Heunensäule는 대성당과 어울리지 않는 보잘 것 돌기둥에 불과했다. 결국 마인츠대성당 측에서는 Heunensäule를 Miltenberg의 야산에 방치한 채, 이를 인수하지 않았다.

Miltenberg의 야산에 방치되었던 Heunensäule는 그러나 마인츠 대성당 착공 1000년을 맞는 1975년 드디어 대성당을 마주보며 현재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마인츠 시는 1000년의 기다림 끝에 당당히 대성당과 마주보고 서게 된 Heunensäule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Heunensäule 하단부를 청동으로 장식하고, 그 장식위에 로마 투구, 마인츠의 바퀴(Mainzer Rad)를 비롯, 마인츠 2000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조각과 전각으로 꾸며, 이제는 마인츠 시의 대표적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1000년의 기다림 끝에 결국 마인츠 대성당과 함께 하게 된 Heunensäule. 1000년의 그 외로움을 생각하며, 한 번이라도 더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도록 하자.

2020년 10월 16일, 1191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