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6)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마인츠 대성당 앞에 서다

사진1. Bild von lapping auf Pixabay

유럽 중세 1000년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가 중심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유럽 각국에는 문화재급 교회가 셀 수 없이 많고, 독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호사가들은 3대 교회, 4대 교회 등 교회의 가치를 측정해 손꼽아 보는 예가 많고, 독자분들도 독일 4대 고딕교회, 3대 로마네스코 교회 등, 다양한 교회건축물에 대한 품평을 들었을 것이다.

마인츠 대성당(Mainzer Dom)은 독일 3대 교회의 하나로 소개된다. 다른 두 개의 교회는 트리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이다. 그러나 여기서 3대교회는 건축 양식이나 크기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성로마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는 7인의 선제후 가운데 3인의 성직제후가 있는데, 바로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이다. 따라서 독일 3대 교회는 바로 이 역사적 중요성에 기인한 것이다. 물론 건축사적인 면이나, 그 규모 역시 역대급으로 손색이 없다.

이제 마인츠 대성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영원한 건설현장 마인츠 대성당

975년 마인츠주교에 취임한 Willgis는 마인츠 돔(Dom)을 신축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마인츠 돔은 그 규모가 크지 않았는데(오늘날의 Johannis Kirche) Willigis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의 돔을 짓기로 결심하고 이를 시행한 것이다. Willigis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마인츠의 새로운 대성당의 모델로 하였고, 새로 건축될 대성당을 통해 마인츠가 “알프스 이북의 제 2의 로마”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인츠 대성당은 완공(1009년 8월 29일)을 며칠 앞두고 대규모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만다. 재건축을 통해 1036년 Adalbert I세 대주교 집전으로 완공식을 갖고 첫 봉헌을 드리게 된다. 당시 봉헌식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주교, 대주교들이 참석하여 이 거대한 대성당의 완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마인츠 대성당은 불운하게도 오늘날까지 대화재로 7 번 소실되었고, 농민전쟁 등 여러 전쟁과 특히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계속해서 재건되었다. 그렇기에 1000 년 된 마인츠 대성당은 “영원한 건설 현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마인츠 대성당에서는 다양한 건축양식(로마네스코, 고딕, 바로크, 후기 로마네스코)을 감상할 수 가 있다.

중세 유럽을 호령한 마인츠 대성당

Willigis에 의해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마인츠에 교황권을 상징하는 “Heilige Stuhl”이 설치되어, 교황권을 대행할 수 있는 주교관구로 우뚝 선 마인츠, 그리고 마인츠 대성당은 이후 신성로마황제 대관식, 십자군의 출발지, 제국의회의 회의장소 등으로 유럽 가톨릭의 중심지로 확고한 위상을 다지게 된다.

마인츠 대성당에서는 7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으며, 대성덩 아 광장에서는 중세 유럽 봉건제후와 관료들 전체 대표자 회의(2만명 추산)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또한 십자군 전쟁 시에는 원정군의 출발 지점으로 많은 십자군 병사들의 집결지 역할도 하였다. 이렇듯 마인츠 대성당은 유럽 가톨릭 1000년의 중심지 이자, 성로마제국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위상으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초래한 면죄부 판매도 당시 마인츠 대주교인 Albrecht 대주교에 의해 촉발된 아픔도 지니고 있다.

또한 흑역사로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마인츠로 진격한 프랑스 군에 의해 마인츠 대성당은 1797년과 1803년 사이에 성당으로서는 폐쇄되고 병원과 막사로 오용되었으며 심지어는 철거 될 계획까지 수립된 적이 있는 아픔도 지니고 있다.

마인츠 교구를 개척한 성인 Bonifatius,

마인츠 대성당 입구 오른편에는 Bonifatius(675년경- 754년 6월 5일) 성인의 석상이 서있다.

Bonifatius 성인은 700년대 프랑크 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베네딕도회 앵글로색슨족 선교사이자 초대 마인츠 대교구장으로 “독일의 사도라(Apostel der Deutschen)고 추앙받는 성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Bonifatius 성인 독일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여 공경하고 있다.

본래 잉글랜드 태생이었던 그는 719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로부터 독일 선교 사목 지시를 받고 게르만족에 대한 선교를 수행하였으며, 754년 현재 독일 북부지역인 Friesland에서 53명의 일행과 함께 이교도에 의해 순교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마인츠 성당에서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된 채 풀다에 모셔졌는데, 이 운구길은 현재 독일의 순례길 “Bonifatius-Route”로 지정되어 있다.

2020년 10월 23일, 1192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