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11)

Darmstadt: Ludwig 가의 영광과 비극이 한자리에 ④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과 Ernst Ludwig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중세 다름슈타트를 경험하자

1330년 도시권한을 부여받은 이후 다름슈타트는 이러한 중세 도시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Marktplatz, Rathaus, Stadtkirche 그리고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성벽 등이 다름슈타트의 중세 유적이자, 오늘날에도 그 쓰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호에서는 중세 유적으로 Weißer Turm, 구 시청사(Altes Rathaus), 시장광장(Marktplatz)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도 중세 다름슈타트를 좀 더 경험해보도록 한다.

Marktbrunnen

중세시대 중세유럽의 도시 광장들은 시장의 기능이나 종교시설의 광장으로, 또는 시청 앞 광장으로 도시의 중심적 공간을 형성하며 공공의 소통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영주의 공지사항이나, 새로운 법률의 공표, 때로는 처형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마녀사냥 시대인 1500년대에는 광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졌고, 다름슈타트 시장광장(Marktplatz)에서는 37명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세 유럽에서의 공장들은 공공의 장소였으며, 그 가운데 광장분수는 시민들의 식수공급원이자, 광장의 장식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구교(가톨릭)가 강한 지역에서는 1500년 후반대에 많은 광장분수가 건설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영향으로 발발한 농민전쟁의 결과, 가톨릭 주교들이 시민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시혜성 복지사업으로 이루어 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Brunnen”은 일반적으로 ‘분수’, 또는 ‘우물’로 번역되어왔는데, 우리의 인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중세 유럽의 Brunnen은 도심에서 떨어진 상수도원에서 수도관을 통해 광장으로 물을 끌어와 시민들이 식수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물이 하늘로 솟는 ‘분수’도 아니었고, 땅을 깊이 파 물을 긷는 ‘우물’도 아니다. 오히려 관을 통해 식수가 늘 흘러나오는 “공공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깨끗한 식수 공급”은 전염병 등, 많은 질병을 예방하는 중요한 보건정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다름슈타트 시장광장분수(Marktbrunnen)1486년 최초로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다름슈타트 최초의 식수 공급원으로, 호수나 강 등으로부터 목재의 수도관을 통해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였다. 이후 1491년과 1546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다름슈타트 시장광장분수는 1780년 건축가 Johann Helfrich von Müller에 의해 새롭게 건설되었는데, 기존의 분수는 철거되고, 광장 앞 궁전과, 광장 주변의 귀족들의 저택들과 어울리게 석재로 새롭게 지어졌다. 다름슈타트광장분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다름슈타트 시가 철저하게 파괴된 이른바 “Brandnacht(1944년 12월 11일밤)”에서 시장광장과 그 주변 건물가운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Stadtkirche

다름슈타트 Stadtkirche는 8,9세기경 묘지 예배당(Begräbniskapelle)로부터 출발, 1369년 마인츠 Gerlach주교에 의해 신부가 집전하는 정식성당(Pfarrkirche)로 승격된 다름슈타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1526년부터 개신교 중심교회로 거듭난 Stadtkirche는 다름슈타트 개신교의 본부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재 2500여명이 Stadtkirche 신도로 등록되어 있다.

1380년 정식 교회로 건축된 이래 Stadtkirche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차례 증개축을 하여 시대별로 다양한 건축형태를 보여주었다.

초기 중시시대의 건축양식에서, 1380의 고딕양식 건축으로부터 바로크 양식, 후기고전주의 양식 건축을 지나, 2차 대전의 피해를 복구하며 1953년 오늘날의 Stadtkirche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다름슈타트 Stadtkirche의 또다른 특별한 점은 교회 내에 영주들과 고위 관료들의 석관과, 유골등이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Stadtkirche와 궁전사이 지하 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지하통로는 영주와 그의 가족들이 자신의 조상들을 일반인들의 눈길을 피해 참배하는 통로로 쓰였다고 한다. 실제로 교회 내 석관안치 장소 밑으로 지하 터널이 시작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도시성벽 (Stadtmauer)

1330년 다름슈타트가 당시 신성로마황제 Ludwig der Bayer로부터 도시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점은 첫 연재에서 밝힌바 있다.

신성로마황제로부터 도시권한을 받는 중세도시는 신성로마황제로부터 평화와 보호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시장을 개설할 수 있고, 도시 성벽을 축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에 따라 다름슈타트에도 성벽이 건설되는데, Hinkelsturm, Residentschloss 등 시장광장(Marktplatz) 주변에서도 그 유적들이 살펴볼 수 있다.

중세도시의 성벽은 도시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높은 성곽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1330년 도시권한을 부여받은 이후 다름슈타트는 이러한 중세 도시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1202호 30면, 2021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