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2)

마인츠(Mainz): 유럽의 전(全)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②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마인츠는 기원전 30년대부터 나폴레옹이 유럽으로 진격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1806년까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의 중심부였으며, 1793년에는 독일 최초로 시민혁명을 통한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선포하며 근대 시민국가의 이상을 독일 전역에 전파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마인츠(Mainz)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까지 2000년 가까이 유럽 역사의 중요 장면을 생생하게 내보이고 있는, 독일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이다.

이제 우리는 2000년의 도시 마인츠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보오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군사적 용도로 1884년 건설한 마인츠 중앙역을 출발해 중세의 1000년의 마인츠, 나풀레옹과 함께 맞는 격동의 19세기, 시민혁명과 프로이센으로의 병합에 따르는 마인츠 시민들의 영광과 좌절의 그 현장으로 함께 떠나보자.

화려한 중앙역 개통식과 허허한 마인츠 시민들

특정 공간에 서게 되면, 그 공간에서 경험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는 깊은 감회 속에서, 그리움과 부정이 교차되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인츠 시민들에게는 마인츠 중앙역(Mainz Hauptbahnhof)이 바로 환희와 좌절의 기억이 교차하는 그런 다중의미의 공간이다.

1884년 10월 15일 마인츠 중앙역은 유럽 전역의 큰 관심 속에서 화려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개통식 이전부터 마인츠 중앙역에 대한 기사가 독일 전역은 물론, 파리 등 유럽 전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신축된 마인츠 중앙역은 45m 폭에 300m의 플랫폼을 구축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역 가운데 최장의 플랫폼이었다. 역사 안의 화려한 대합실도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또한 라인강을 따리오던 철로를 중앙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늘날 “Mainz – Römisches Theater” 역에서 중앙역 사이 구간에 1200m의 터널을 시공한 것도 당시로는 초현대식 공법으로 독일 전역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마인츠 중앙역에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당시 프로이센의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위용은 어떠한가?

유럽의 전통 강호인 오스트리아와(보오전쟁, 1866년) 프랑스와의(보불전쟁, 1870-1871) 전쟁에서의 승리를 거두어 유럽대륙 최강자로 발돋움하였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는 자녀들의 결혼으로 사돈지간이었으니 그 위세는 80여년 전의 나폴레옹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마인츠 중앙역 개통은 당시 유럽 최대의 행사로 성대히 치러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마시대이래 특히 빌리기스(Villigis)가 975년 마인츠 대주교로 취임한 이래 1000년 가톨릭 중심지로 유럽을 호령하던 마인츠 시민들은 이 화려하고도 요란한 개통식을 그저 들뜨고 기쁜 마음만으로는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1800년대 초 나폴레옹에 점령되어서는 프랑스의 일개 주(Donnersberg)의 수도로, 나폴레옹 이후 메테르니히 조약에 따라 헤센공국에 지배받는 라인헤센(Rheinhessen)의 지역 도시로, 또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군이 주둔하면서 공동 관리하는 군사도시로 변화하며 마인츠는 급격히 옛 영화와 명성을 잃게 되었다.

보오전쟁 이후 프로이센의 패권 하에 속한 마인츠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변경의 군사도시로 그 역할이 한정되고, 이에 따라 군사적 목적이 반영된 마인츠 중앙역 개통은 마인츠와 시민 자신들의 몰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 한국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다.

1925년 개통된 서울역(당시 경성역)은 도쿄 역에 이은 동양 제2의 규모로 지어졌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일본의 만주와 중국으로의 진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동양 제2의 규모인 서울역의 화려한 개통식을 기쁨과 들뜸으로만 바라보았을까? 아니면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서글픈 표정으로 억지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을까?

마인츠 라인강변 Fischtor와 Holzturm 사이에 있던 마인츠 중앙역이 현 위치로 옮기게 되자, 당시에는 역 인근 오늘날의 Neue Stadt 구역이 신설되는 효과는 보았을지 몰라도, 결국 마인츠 시를 라인강변에서 마인츠 중앙역으로 한정시키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중앙역이 도시를 양분하는 장애물 역할을 하게 된 점은 마인츠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중앙역 건축이후 마인츠에는 개신교 교회인 Christus kirche 이외에 문화재 급 공공 기념건축물은 더 이상 지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마인츠 시민들을 더욱 우울하게 한다.

이렇듯 역사에 있어 승자의 기록만으로는 그 온전한 의미를 깨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인츠의 대 저택들

이제 마인츠 중악역을 뒤로 하고 시내로 들어가 보자

중앙역 앞 Bahnhof Strasse를 따라 250m 정도 걸어가면 Schiller Strasse가 나오면서 좌우로 바로크 양식의 대저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인츠 시에서는 이 대저택들을 궁전(Palais)으로 불리고 있다.

Grosse Bleich와 Bahnhof Strasse 모퉁이에는 룩셈부르크공 가문의 Rollingen 남작의 거처로 사용하다 1777년 Stadion 남작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 Stadioner Hof(1728)로 불리게 된 대 저택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건너편 Schiller Strasse 입구에는 Erthaler Hof(1735)가, 그리고 Schiller Platz쪽으로 20m 정도 내려오면 맞은편에 마인츠 대주교이자 제후였던 Johann Philipp von Schönborn 가문의 저택인 Schönborner Hof(1670)가 우뚝 서있다. Schönborn가문의 Melchior Friedrich 백작이 지은 비엔나의 Schönborn궁전(1717)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옆으로는 Bassenheimer Hof (1756)가, 그리고 Schiller 광장 1번지에는 Osteiner Hof(1749)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Bassenheimer Hof는 Ostein 제후가 미망인이 된 자신의 누이동생을 위해 지은

대저택으로 Osteiner Hof와는 비스듬이 마주보며 남매간의 사랑을 과시하고 있다. Bassenheimer Hof로 불리어 진 것은 그녀의 시가 가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건물에는 양 가문(Ostein과 Bassenheim)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렇듯 대저택들에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마인츠 시내에는 궁전과도 같은 이러한 대저택이 10여개에 달하고 있고, 각 대저택 앞 안내판에는 독일어와 영어로 해당 대저택에 대한 소개 글을 싣고 있어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마인츠의 대저택(Palais)을 중심으로 하는 마인츠 방문을 적극 추천한다.

그러면 마인츠에는 이러한 대저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인츠 구 시가지에 산재한 대저택들은 대부분 유럽 가톨릭 중심지 마인츠의 위용을 내보이고 있는 건축물들이다. 이들은 Kurfürst(신성로마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는 제후) 또는 그 가문들의 거주지로서, 유럽 가톨릭 중심지로서의 마인츠의 위상과 관계가 있다.

지난 호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마인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수차례 열렸으며, 중세 유럽 봉건제후와 관료들 전체 대표자 회의(2만명 추산)가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한 도시이다. 또한 십자군 전쟁 시에는 원정군의 출발 지점으로 많은 십자군 병사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던 마인츠 유럽 가톨릭 1000년의 중심지 이자, 성로마제국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Kurfürst는 신성로마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는 영주로서 한국어로는 선제후(選帝侯)라고 한다.

1356년에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 Goldene Bulle, 金印勅書)에 따라 7선제후 제도와 다수결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하는 7선제후는 3인의 성직제후로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4인의 세속제후에는 보헤미아 국왕(훗날 오스트리아의 대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훗날 프로이센 왕), 라인 궁중백이다. 금인칙서라는 이름은 황금의 옥새를 사용한데서 기인했다.

이렇듯 마인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권을 갖고 있는 도시였고, 선제후들의 회의에서도 마인츠의 정치 종교적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선제후 회의 소집권이 마인츠대주교에 있었으며, 회의 시 마지막으로 투표를 하는 권리를 가져, 마인츠대주교는 가부 동수일 때 결정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이는 오늘날 공공단체의 의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군사적 용도로 지어졌으나 한 번도 군사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Proviant Magazin

Schiller Strasse 대저택 사이로 성격이 다른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붉은 사암으로 성채같이 솟아있는 Proviant Magazin이다. 7층으로 지어진 Proviant Magazin은 애초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졌다.

나폴레옹의 퇴각 후, Hessen-Darmstadt 대공국에 속하게 된 마인츠는 독일연방(Deutscher Bund)의 일원으로 프랑스의 침입을 방방하는 서부지역의 군사요충지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에 따라 마인츠에는 유럽 전통 강호 오스트리아와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신흥 강자로 부상한 프로이센 양 국의 군대가 공동으로 주둔하게 된다.

이들 군대의 주둔으로 병영 시설의 확충이 필요하게 되고, 군수물(식량, 병기 등) 창고 용도로 Proviant Magazin이 1963년부터 건설에 들어간다. 1967년에야 완공되게 되는데, 완공 시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여,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즉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 전쟁이 발발, 2개월 만에 오스트리아의 항복으로 끝난 전쟁으로 마인츠 주둔 오스트리아 병력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지어진 Proviant Magazin은 마인츠의 골칫덩이로 전락하여, 1920년대에는 수영장으로 개조가 모색되었다가, 1830년대에는 철거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한 번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후 Proviant Magazin 2차대전 시에는 폭격으로 훼손되었고, 1966년까지는 빈 건물로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게 된다. 1966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고, 수시로 용도 변경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결국 2004년 민영화를 거쳐 현재 개인 주택과 고급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Proviant Magazin 바로 옆 귀퉁이에는 조그만 로마시대 유적 Hypokaustum이 자리잡고 있다. Hypokaustum은 로마시대 난방장치로 마루 밑 난방역할을 하였는데, 오늘날 온둘과 같은 “Bodenheizung”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불을 지쳐 건물 바닥 및 공간에 더운 열기를 보내, 전체를 데우는 난방 방식이었다. 이러한 Hypokaustum 난방시설은 로마시대 모든 공공 목욕탕에서 사용되었다.

이제는 Schiller Platz의 주인공 실러 동상으로 가보도록 하자.

사진:

1.

2. 마인츠 중앙역

3. Osteiner Hof

4. Proviant Magazin

2020년 9월 25일, 1188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