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7)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마지막 회)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마인츠는 기원전 30년대부터 나폴레옹이 유럽으로 진격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1806년까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의 중심부였으며, 1793년에는 독일 최초로 시민혁명을 통한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선포하며 근대 시민국가의 이상을 독일 전역에 전파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마인츠(Mainz)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까지 2000년 가까이 유럽 역사의 중요 장면을 생생하게 내보이고 있는, 독일에서 몇 안 되는 도시이다.

이제 우리는 마인츠대성당을 벗어나 이번 역사산책의 마지막 목적지인 마인츠 국립극장으로 간다. 마인츠 국립극장 앞 광장은 Gutenberg 동상과 북위 50도 선의 통과지점 등의 의미도 있지만, 마인츠에 있어 나폴레옹의 의미, 또는 나폴레옹에 있어 마인츠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하겠다.

◈Gutenberg 동상과 북위 50도선

마인츠 국립극장앞 광장에서 국립극장을 마주보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동상이 서있다. 마인츠시는 유럽에서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한 구텐베르크(Gutenberg)를 마인츠 대표 인물로 선정하였다. 금속활자 발명으로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그를 통해 성서 및 일반 지식의 대중화에 이바지 한,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꾼 혁명적인 결과를 수반하였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마인츠 인(人)으로 선정된 것이다.

또한 1997년 Time지(紙)는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중여한 발명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선정한 바 있다.

마인츠 극립극장 앞에도 구텐베르크 동상은 오랜 논의끝은 1837년에 현 위치에 세워졌으며, 2008년부터 2년간 청소 및 보수를 거쳐 2010년 카니발행사 직전인 2월 4일 다시금 동일한 위치에 세워졌다.

마인츠 국립극장 앞 구텐베르크 동상이 더욱 의미를 갖는 것은 마인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념동상을 세운 최초의 사례라는 점이다.

구텐베르크 동상을 마주하고 왼쪽 편 보도를 보면, 동으로 된 북위 50도 표시선을 볼 수가 있다. 한반도 최북단이 중강진이고 북위 41도 경이고 가장 추운 지역인데, 온화한 날씨의 마인츠가 북위 50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방문객들은 북위 50도 표시선을 매우 신기하게 바라본다. 여담으로 북위 38도선은 유럽에서 시칠리아, 아테네를 지나고 있다. 유럽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보다 상당히 북쪽에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과 마인츠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 1804년, 나폴레옹은 군사적요충지인 마인츠를 처음으로 방문한다. 이후 1814년까지 10년 재위기간 동안 총 9차례 마인츠를 방문하였으며, 방문시 장기간 머무르곤 하였다.

1805년에 발표된 프랑스 중요도시 36개에 마인츠가 선정되고, 마인츠가 프랑스 Donersberg 주 주도로 결정할 정도로 마인츠에 대한 나폴레옹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마인츠 방문 시 나폴레옹은 항상 Marie-Louise 황후를 대동하였으며, 오늘날 주의회로 쓰이는 Deutschhaus에 거주하였다. 나폴레옹은 Deutschhaus를 자신의 황실 궁전으로 삼고, 조금 떨어진 선제후 궁전(오늘날 Römisches – Germanisches Museum)와 연결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Grande Rue Napoléon”거리를 건설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Ludwigsstraße”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마인츠 국립극장

마인츠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마인츠 국립극장(Staatstheater Mainz)은 나폴레옹의 직접적인 건축 지시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마인츠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 계획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Grande Rue Napoléon”에 당시 최고의 극장으로 평가받던 St. Petersburg의 “Großes kaiserliches Theater”를 모델로 새로운 극장을 지을 것을 명령, 1809년 첫 삽을 뜨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고, 1815년 나폴레옹의 퇴위 및 유페 등 우여곡절을 거친뒤, 1829년 공사는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때 극장 건축을 지휘한 건축가는 그 유명한 게오르 몰러(Georg Moller)이다. 몰러는 당시 건축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다름슈타트의 유명 건축물은 모두 몰러에 의해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헤센공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마인츠는 메테르니히 체제에 의해 헤센 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1833년 9월 21일 마인츠 국립극장은 “Großherzoglichen Nationalbühne Mainz”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마인츠는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에 이어 독일에서 네 번째로 “대극장”을 보유한 도시가 되었다.

몰러에 의해 건축된 마인츠 국립극장은 당시에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건축기법을 선보였다.

공연 무대와 관객석의 분리, 외부로 돌출된 반원형 구조 등, 목적 우성시한 건축 기법은 고전적 극장건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도였고, 당시 시민들이 이에 열광하였다. 몰러의 이라한 새로운 기법은 드레스덴의 젬퍼극장(Semper Theater)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833 년 마인츠시는 몰러의 공로에 대한 감사로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했다.

마인츠 국립극장은 1909년과 1910년 사이 증축 및 개축이 되었으며, 2차 대전 중이었던 1942년 8월 12일 밤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심하게 파손되었다. 이후 복구작업을 통해 1949년에 애초 원향보다 축소된 오늘날의 형태로 복원되었고, 1951년 11월 24일 GRAND OPERA PARIS의 발레공연으로 재개관식을 가졌다.

마인츠 개신교의 상징 Christuskirche

나폴레옹과 마인츠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종교자유”의 선포이다.

나폴레옹은 가톨릭만 허용되던 마인츠에서 개신교도와 유대인 등 종교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1800년대 초 당시 마인츠에는 약 300명 정도의 개신교 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일날에는 순례길을 떠나듯 조심히 라인강을 넘어 이웃 도시인 비스바덴에 가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종교 자유 선언 후에는 당당하게 마인츠 개신교 공동체에서 예배를 들이며 그 세를 확대했다. 1828년에는 마인츠의 첫 대성당이었던 Johaniskirche를 개신교 교회로 확보하였으며, 그 세가 점차 증가하여, 1900년경에는 개신교도 숫자가 30,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100년 사이에 개신교도 숫자가 100배가 늘어난 것이다.

이에 힘입어 마인츠 개신교도들은 마인츠 가톨릭의 중심역할을 하는 마인츠 대성당에 버금가는 개신교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896년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뒤 1903년 7월 2일 Christuskirche 창립예배를 갖고 문을 열었다.

Christuskirche는 높이가 80m를 넘어 마인츠 대성당에 버금가며 당시 마인츠를 대표한 상징물로서, 마인츠 개신교도들의 자부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나폴레옹과 마인츠는 단순히 정복자와 피정복민으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도시 건설, 종교자유를 통한 개신교의 성장, 마인츠 대학의 확대 등 나폴레옹 통치는 마인츠에 많은 변화를 도래하였다.

Christuskirche가 이번 역사산책의 종착지이다. 그러나 마인츠는 2000년 도시답게 이외에도 많은 유적들을 품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 루트, 시민혁명의 유적지 루트, 산재해 있는 중세 성당답사 루트, 군사적 요새로서의 유적지 루트, 마인츠와 비스바덴간의 현대사 유적지 루트 등, 2박 3일은 꼬박 둘러보아야 할 말 그대로 “유서 깊은 도시” 이다.

1195호 30-31면, 2020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