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멘 한국학교 초대 이사장 이자 교장 이광택 교수를 말하다.

허송희(브레멘 한국학교 교장)

독일 유학 전 학생 이광택

학생 이광택은 서울대 법대 학생회와 사회법학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가진 부채의식과 사명감으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분신 산화한 전태일의 마지막길을 배웅하려 서울 성모병원 영안실을 찾은 그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목사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추도를 부탁했다. 이에 청년 이광택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암송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후 이광택은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퇴학에 이어 강제 입영됐다. 75년 군에서 제대한 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일하던 이광택은 강원룡 목사가 주도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간사로 일하면서 노동계를 위해 교육활동과 노조 등에 출강하기도 하고 거리투쟁에도 나섰다.

“전태일이 분신하고 6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대학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살얼음판 같은 시국이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어요. 노동야학을 하면서 전태일의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동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지요.”

이광택은 강목사의 도움으로 독일 유학을 가게된다.

독일 유학생, 브레멘 한인회장, 브레멘 한국학교 초대 이사장 겸 교장 이광택

1960~70년대에 한국에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에 정착하면서 자녀들의 모국어 교육을 위해 한글학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3년도 아헨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33개의 한글학교가 독일에 개교되었다 . 그 한글학교 중 하나인 브레멘 한국학교는 1983년 개교했다.

초대 이사장 겸 교장이 유학생 이광택이었다. 이광택은 1979년 30세를 넘은 늦은 나이에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Bochum에 있던 독일 Ökumenisches Studentenwerk e.V.의 초청으로 유학을 와 1980년 봄부터 Uni Bremen에서 노동법박사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브레멘 한국 학교가 개교 된 1983년에는 셋째를 낳아 5인 가족의 가장이기도 하였다. 당시 브레멘에는 유학생이 몇명 없었는데 서른 중반의 나이 때문 이었는지 유학생들의 선배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전공이 노동법이어서 지역주민과 유학생들의 노동 관련 문제 등에 자문을 하곤 했다. 소임이었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이광택이 브레멘 한국학교의 초대 이사장겸 교장으로 나선 것은 브레멘 지역 한인 회장으로 선출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브레멘 지역의 한인은 주로 병아리 감별사, 한국식품 판매인 등 주민들 중심이었는데 이들은 변화를 원했고 브레멘 한인회 회장에 유학생 이광택을 추대하였다.

그는 그런 주민들의 바램에 호응하고자 브레멘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에 있는 한인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공동 관심사를 취합하였고 브레멘과 주변 지역에 한국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 뿐 만 아니라 다수의 한인 입양아들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과 지금은 없어진 브레머하펜 지역 미군부대 주변에 상당수의 한인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역의 모든 한인들은 우리 2세를 위한 우리말 교육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였다. 또 하나의 고무적인 사실은 독일인 양부모들의 헌신적인 자세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이 우리말을 배우는데 절대적인 지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 스스로도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수요가 확실하다는 믿음이 있어 한글 학교가 아닌 한국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한글학교라는 이름 대신 한국학교라고 명한 것은 특별히 고국인 “대한민국”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영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브레멘 지방법원에 등록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자녀들의 교육 그리고 어른들의 한국어 문화교육 나아가 독일과 한국의 더 깊은 이해를 협회의 존재 목적으로 정의했고 이렇게 작성된 정관으로 “e.V” 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한독가정의 도움으로 세무청(Fianzamt) 에 등록하여 비영리 사단법인 (gemeinnütziger eingetrager Verein) 브레멘 한국학교(Koreanisch Schule Bremen e.V) 가 1983년 4월 9일 개교하였다.

이러한 브레멘 한국학교는 작지만 여러 폐교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2018년에는 브레멘 적십자 만남의 장소에서 설립 35주년을기념하였는데 그 자리에 초대 이사장 겸 설립자인 이광택 교수가 참석하여 아마추어 이상의 성악실력으로 올덴부르크 성악가 스피어 교수와 두엣 무대를 가졌다.

독일 유학 후 교수 이광택

1988년 한국으로 귀국한 한국노동연구원 설립멤버로 참여하였다. 1991년 산업사회 연구소를 설립하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1994년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노동법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활발한 학문적 활동과 함께 한국노동법학회 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회장, 한국사회법학회 회장을 역임한다. 또한 여러 국가 자격 시험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노동사회법학회 (ISL&SSL) 간부로 세계대회를 조직하고 현재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이래 (사)한국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노동법 관련 연구를 꾸준히 하여 우리사주제, 근로자 이사제 등은 이광택 교수가 30년 넘게 연구, 주장해온 것들이 제도화된 케이스이다.

브레멘 한국학교 교장 허송희가 만난 이광택 교수님

2017년 9월 이광택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한국학교 교장을 위임 받고 나서였다. 한국학교의 설립 이유가 궁금했다. 이름과 전공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국민대학교 명예교수인 교수님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메일에 정성스러운 대답과 잘 정리된 사진을 보내 주셨다. 만나야 할 인연이었던 것인지 2017년 9월 프라하에서 ILO 세계대회가 있었고 대회를 방문한 김에 브레멘 한국학교에도 20년만에 방문 하셨다 .

내가 만난 교수님은 다양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록의 힘, 긍정의 힘, 여유의 힘 그리고 행동의 힘이었다.

기록의 힘: 대화를 할 때마다 교수님은 수첩을 꺼내 기록하기도 하고 기록한 것을 다시 보기도 하였다. 교수님의 기억은 또렷 했고 교수님은 교수님의 일관성을 기록으로 지켰다. 그로 인해 교수님은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나도 브레멘 한국 학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긍정의 힘: 교수님은 노동법을 전공해 노동자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와 사업자들에게 서로의 입장과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멘토였다. 초보 교장이 각자 역할을 강조하며 흥분했을 때 교수님은 대화의 중요성, 서로 이해함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열린마음으로 솔직하게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고 이야기하다 보면 이해하고 합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이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모두 기대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후로 나 역시 우리 브레멘 한국학교가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 오고 싶어하는 학교 그리고 교사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데 모든 구성원들의 소망이 있다고 믿고 있다.

여유의 힘: 교수님은 평생 그가 가진 것을 나누었다. 소임이고 소명이었다. 나누어야 한다고 결정하는 순간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행동하였다. 행동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변화가 없다고 했다. 변화를 원하면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행동은 목적에 이르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다. 비록 목적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배움이 있어 이를 수 있는 나에게 맞는 변경된 목적을 세운다. 우리는 그를 위해 행동하여야 한다.

나는 교수님을 브레멘 한국학교 교장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분이다. 교수님은 브레멘 한국학교에 변화를 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 만 아니라 내 개인의 삶에 변화를 주었고 방향성을 제시했다 . 교수님을 만난 후 나는 어떤 자리에 있던 그 자리에 집중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살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생각은 지금 내가 브레멘 한국학교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고 있다.

2020년 2월 28일, 1160호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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