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화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기호 :
도자기 ③

동서교류 속의 도자기

동서교류를 이야기할 때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비단길 즉 실크로드이다.

실크로드는 그 단어 그대로 중국의 비단이 서양에 전해지는 경로를 말함이고 이처럼 비단이 동서교류에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별하다 할 수 있다.

중국비단의 서양전파(수출)가 절정을 지나는 동안 새로운 상품이 동서교류사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도자기이다. 도자기는 비단 이상으로 큰 수요를 만들어 내며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도자기 교역의 발달은 8세기 들어서 조선술과 항해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탄력을 받게 된다. 도자기의 특성상 운송 중 파손될 가능성이 높고, 말과 낙타를 이용한 육로중심의 운송은 부대비용의 증가 및 큰 위험성을 감수하여야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하여, 대량의 도자기를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동서양 상품 교류에 뛰어든 도자기 무역은 점차 쇠퇴해가는 비단교역에 이어 중국이 세계 교역의 중심이 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렇듯 동서양을 흘러다니는 도자기의 경로가 순례자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흔히 도자기를 ‘필그림 아트(pilgrim art)’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도자기는 “흙과 불의 예술”이라 불린다. 얼핏 도자기가 장인의 노력과 예술적 영감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공예적인 산물 같지만, 실상 도자기는 고도의 화학적, 물리적 기술이 집합된 과학이다.

일찍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중국 도자기는 산업혁명을 전후로 세계 경제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 왕실과 귀족들에게도 필수 소장 품목으로 손꼽히던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궁전에 도자기 전시관을 만들고 청화자기로 온 벽을 화려하게 장식해 부와 권력을 자랑했다. 중앙집권화로 통일국가를 이루어가던 유럽 여러 국가에서도 왕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중국 도자기를 구입해 도자기 전시관을 만드는 것이 유행했다. 중국 자기는 아시아를 뛰어넘어 오스만,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까지 당대 전 세계의 예술문화를 선도했으며, 이후 타국의 요업 발달에 매우 중요한 표본이 되었다.

새뮤얼 존슨과 같은 학자는 “1세기(17~18세기) 동안 물경 7천만 점의 도자기가 유럽에 수입되어 왕과 귀족들의 재산이 탕진될 정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도자기 한 개의 값이 금값에 버금가는 가격으로 거래되었으니 이러한 기록이 단순한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세계도자기사는 이처럼 중국에서 시작하여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우리나라가 그 보조를 같이 하다가 17세기에 일본이 여기에 합류하고 18세기에는 유럽이 다시 끼어들면서 명실공히 세계도자기사를 형성하고 있다.

유럽의 도자기 마이센 도자기 (Meissener Porzellan)

유럽의 경우, 본격적인 도자기 역사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체코와 폴란드 국경 지역에 위치한 동부 독일의 작센주는 일찍부터 강대한 세력을 갖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바흐와 헨델의 음악 전통이 살아 있는 드레스덴도 여기 있다. 괴테 가도를 따라 작센주를 여행하다 보면 마이센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인구 5만 명의 아담하고 전원적인 도시이지만 유럽 도자기 산업의 원류이자 성지 같은 곳으로 유럽에서 최초로 자기를 구워 낸 ?마이센 가마?가 위치해 있다.

독일 마이센의 연금술사였던 뵈트거(Johann Friedrich Boettger)와 작센 공국의 제후였던 아우구스트 2세 아래 봉직하던 취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가 부딪치면 쨍하고 투명한 소리를 내는 자기를 개발함으로써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본격적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마이센 도자기의 탄생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이센 도자기가 첫선을 보인 시대는 바로크의 전성기로, 당시 유럽의 제후들은 중국의 백색자기를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했다.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광맥을 찾듯, 백색 금을 찾고자 하던 시기이다. 백색 금을 만드는 기술을 획득하고자 유럽의 권력자들과 상인, 학자, 기술자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시기는 유럽의 도시가 발달하고 국제간에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일차 산업에 의지하던 경제 구조가 변화되고 있던 시점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대였다.

백색의 연금술사를 꿈꾸는 이들의 경쟁은 ?강건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 작센 지역의 제후 아우구스트 2세(August der Starke)에 의해 일단락됐다.

아우구스트투스 2세는 백색 자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연금술사와 과학자를 동원해 실험에 착수했다. 취른하우스는 이 임무를 맡게 된 화학자였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던 중이었다. 한편 뵈트거는 프로이센 태생으로 일찍이 그의 고향에서는 연금술사로 소문이 자자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는 뵈트거가 금을 만드는 비법까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연금 상태에서 금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납이나 동으로 금을 만드는 데에 실패만 거듭하자 왕은 화학적 조합만으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뵈트거가 더 이상 금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간파한 왕은 뵈트게거에게 마이센에서 취른하우스와 함께 자기를 개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감옥과 같은 마이센 성의 실험실에 감금된 그는 8년간의 실험 끝에 1709년 마침내 서양 최초의 경질자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철분 함량이 많아 색상이 검붉어져서 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1710년, 드디어 백색의 흙을 찾아내는 한편 제조공정상의 난점을 해결함으로써 유럽도 백색 자기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후 유럽의 도자기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전 유럽으로 보급, 각 나라마다 독특한 고유의 색상과 다지인을 가진 자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710년에 드레스덴 근처의 마이센 성에 ?왕립 작센 자기소? (Koeniglich-Polnische und Kurfuerstlich-Saechsische Porzellanmanufaktur)가 설립되었고 뵈트거의 비법으로 자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사진:마이센도자기

2020년 5월 22일 , 1172호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