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광장들(10)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광장(Piazza di San Marco) ②

비엔날레의 도시 베네치아, 가면 축제의 도시 베네치아, 베니스 영화제의 산실인 베네치아, 오늘날 베네치아를 상상하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수히 많고 성격도 다양하다.

다양한 문화행사를 국제적 규모로 매년 치러내는 베네치아는 분야별로 역사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세계인의 주목을 끌고 그 도시의 옛 명성에 비해 지금도 세계 문화도시로서 손색이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이미 100년이나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와 브라질의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더불어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힌다. 1895년 이탈리아 국왕의 제 25회 결혼기념일을 축하하여 시작된 베네치아시의 축제인데 이제는 전 세계 미술인들의 가장 권위 있는 행사가 되었다.

또 베네치아를 생각하면서 유명한 가면 축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는 단연 카니발(Carnival)이다.

카니발은 어원이 라틴어로 ?육식을 그치다?, ?고기와 작별하다? 라는 말이다. 원래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성회일 전의 마지막 목요일에 시작해서 사순절 전의 마지막 화요일에 절정에 오르며 끝이 난다. 옛날에는 로마의 카니발이 대단히 성대한 것으로 유명했다. 20세기 초의 작곡가 레스피기는 그의 교향곡 <로마의 축제>에서 화려한 로마의 카니발을 소제로 다루었다.

그러나 원래 기독교에는 요란한 축제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 로마의 카니발도 기독교 신앙의 본지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로마 교황이 금지시켜 버렸다. 이후 카니발의 중심지는 로마를 제외한 가톨릭 지역에서 성행했는데 베네치아의 카니발은 그중 가면무도회가 화려해서 유명해진 사례이다.

카니발이 열리는 시기의 베네치아는 다양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남녀노소 서로 다른 가면을 착용하고 신분과 빈부의 격차 없이 누구나 어우러져 축제를 즐긴다. 카니발의 마지막 날인 화요일에는 그룹 무도회가 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모든 행사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 바로 성 마르코 광장이다. 마르코 광장과 성 마르코 성당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광장은 유럽의 응접실

광장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넓은 장소이며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장소로서 길이 175미터에 폭 80미터인 거대한 <살롱> 이라고 할 수 있다. 1797년 나폴레옹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한 곳이기도 하다. 또 광장은 흰 열주로 구성된 아케이드로 둘러 싸여 있어 화려함과 장엄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화려함은 광장의 동쪽에 서있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 성당에서 절정에 달한다.

서유럽의 어떤 성당보다도 이슬람 사원의 특징을 느끼게 하는 외관은 비잔틴 양식을 채용한 덕분에 많은 돔을 가지고 있고 화려함을 자랑한다. 베네치아가 유럽과 동방의 교역의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돔들은 외관보다 성당 내부에서 훨씬 더 화려한 장면을 연출한다.

내부는 모두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전체 면적이 4,240 평방미터를 이루는데 금박을 이용한 유리조각 모자이크는 화려함에 있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성당의 웅장한 내부는 대성당의 중앙 홀에서 시작되는데 눈부신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신자들을 위한 공간의 천장에는 오순절 돔이 있고 교차궁륭 지점에는 예수 승천 돔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동심원으로 표현하면서 화려한 패널의 절정을 이룬다. 이 걸작은 비잔틴 양식을 모방해서 베네치아 장인에 의해 주로 13세기에 만들어졌다.

또 교회 안에는 수많은 귀금속과 보물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순금으로 만들어진 제단 장식 패널인 <팔라 도르>와 가로 3.5m, 세로1.5m의 순금 <제단 받침대>도 주목을 끄는 보물들이다. 그러나 모두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었다. 구입하지 않은 것은 약탈한 것이었다. 대부분 동방 원정시 획득한 노획물이거나. 약탈품들로 장식을 이루었다. 그런 것으로 가장 볼 만 한 것이 성당 정문현관 위에 올려져 있다.

1797년 나폴레옹이 약탈행진을 계속하여 마르코 광장에 들어섰을 때 그의 눈에 띄인 예술품이 있었다. 바로 성 마르코 성당의 4마리의 청동 말 이었다. 원래 이 청동 말은 콘스탄티노플의 전차 경주장인 <히로드롬>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600년 전에 베네치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을 때 전리품으로 빼앗아 온 것이다. 서기 1204년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의 일이다.

당시 십자군을 이끈 베네치아 총독은 95세의 나이였던 엔리코 단돌로 이었다. 단돌로는 바로 이 광장에서 성스러운 십자가 깃발 아래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리라 약속했지만 막상 진군 나간 군대는 기수를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플 돌려 이교도가 아닌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역사 깊은 동로마제국은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수도는 마침내 점령되었고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수많은 보물들은 약탈되었다. 그때 전리품에 이 청동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600년 동안 산 마르코성당을 지켜왔으나 이제 프랑스의 전리품이 되었다.

다시 전리품이 된 청동 은 프랑스에 빼앗겨 한동안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었었다. 프랑스는 한참 후에야 베네치아로 청동 말을 반환했는데 4마리의 말을 돌려주기 전에 이것을 본떠서 새로 4마리의 말을 만들었다. 현재 루브르 궁 정원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 위에 놓인 것이 그것이다.

이제 다시 종탑과 미술관, 그리고 시계탑과 아케이드 열주가 있는 광장으로 눈을 돌려 보자. 오래된 레스토랑과 쇼핑가가 있는 아케이드에는 역사 있는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광장 주변은 근대 계몽주의사상의 요람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는 물론이며 유럽 근대의 계몽주의 역사의 산 증거이자 무대였다. 1748년의 아익스-라-차펠레 조약 이후 이태리는 50년간의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와 함께 시작된 고전 유적의 발굴사업은 이태리를 유럽 최초,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받게 하였고 영국과 북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고전 유적을 순례하게 된다. 이른바 <그랜드 투어>의 시작이었고 그 여행 코스에는 항상 베네치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1720년에 문을 연 카페 프로리안은 18세기 유럽의 여러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사상가, 정치가 등이 모여 철학과 문학,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끊임없이 벌이던 곳이었다.

그리스로 말하면 철학자들이 모여서 담론의 불씨를 지핀 아고라 광장인 셈이다. 루소, 괴테, 스탕달, 바이런, 바그너, 모네, 마네, 니체, 릴케, 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하는 지성은 모두 이 곳을 거쳐 갔으며 성직자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추문으로 투옥되고만 카사노바도 이곳에서 예의 재치와 달변으로 귀부인들을 농락했다. 나폴레옹의 침공 시에는 베네치아에 입성했던 나폴레옹이 제일 먼저 찾았던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이제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면 작은 광장이 하나 더 보이고 그 끝에 두 개의 석주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왼쪽의 궁이 베네치아 총독궁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이다.

다음 호에는 두칼레 궁전에 대해 알아보자.

사진설명

1) 종탑과 산 마르코광장 : 길이 175미터, 폭 80미터인 광장은 <유럽의 응접실>이라고 불릴 만큼 주변이 아름다운 회랑과 열주로 둘러 쌓여 있다. 높이 99미터인 종탑은 1900년경에 특별한 이유 없이 무너져 1902년경에 새로 세운 것이다. 외관은 예전 모 습이지만 내부에는 엘리베이터시설이 되어있어 좋은 전망대 구실을 한다.

2) 산 마르코 성당의 측면 모습 : 1075년부터 외국에서 돌아오는 모든 배들은 법에 의 해 이 성당을 위한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와야만 했다. 사진 왼쪽 측면에 보이는 정문 현관 위의 4마리 말도 그중의 한 예로 제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과의 전쟁 을 마치고 돌아와서 헌납한 전리품이다.

3) 산 마르코 성당의 내부모습 : 중앙 홀부터 시작해서 궁륭과 돔으로 이어지는 모든 벽면이 화려한 금박 유리 모자이크로 이루어져 관람자를 감탄케 한다. 모자이크는 주로 12, 13 세기의 것들로 4,240 평방미터를 덥고 있다.

2020년 5월 1일, 1169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