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화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기호 :
도자기 ②

동양의 도자기

– 중국의 도자기

왜 유럽 여러 국가들은 수백 년에 걸쳐 중국의 자기를 모방하려 했을까?

영국에서 제조되고 있는 본차아나에서 보듯, 중국의 국가 이름을 뜻하는 단어 ‘차이나’는 유럽에서 도자기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도자기의 중심국은 중국이었다. 이는 중국이 도자기의 본원인 것은 물론이요, 도자기에 생활용 그릇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예술로 승화시킨 것도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선사시대에 중국에서는 채도(彩陶)나 흑도(黑陶) 등의 아름다운 토기가 만들어졌으며, 은주(殷周)시대에는 벌써 고온에서 유약을 바른 경질(硬質)의 도기가 등장하고 있다.

당삼채

한나라시대에는 납을 내포하며 저온에서 용해되는 녹색이나 갈색의 유약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唐)․송(宋) 시대에는 자기의 제작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아름다운 제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해외로도 많이 반출되었다. 원(元)․명(明) 시대에는 청화(靑花)․오채(五彩)라고 하는 그림무늬를 넣어 특징 있는 자기가 발달하였다.

중국 도자기의 특징은 청색도자기에서 백색 도자기로 그리고 백색도자기에서 여러 색이 들어간 다색도자기로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백색 도자기는 청자기로부터 발전해 온 것으로서 양자 간의 구별은 질그릇과 유약의 철 함량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진흙에 철 함량이 적으면 흰색으로 되고 철 함량이 많으면 비교적 어두운 색이 나타나게 된다. 다색도자기는 흰색을 바탕으로 여기에 여러 색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기에 백색 도자기 제조는 중국 도자기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 10세기부터 13세기 초에 이르는 당나라와 송나라시기에 중국의 도자기 제작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당삼채가 대표적이다.

당삼채는 중국 국화와 조각 등 공예미술의 특징을 채용하여 붙이고 조각하는 등 형식의 장식도안으로 한 도자기 그릇에 동시에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 유약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세 가지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내면 세 가지 유약이 서로 어울려 세 가지 색깔이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당삼채의 특징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는 중국 도자기 생산의 전성기로서 도자기 생산의 수와 질이 최고봉에 이르게 된다. 남방도시 경덕진이 도자기 도시로 확립된 후 경덕진 도자기 가마가 명나라와 청나라 도자기분야를 수백 년 동안 유지하게 되었고 현재도 중국의 최고급 도자기가 여전히 경덕진에서 생산되고 있다.

–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조선백자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단순히 제작기술과 양식을 유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인 상형청자와 비색청자, 상감청자를 제작하여 제작기술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북송대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문헌에 나오듯이 12세기 고려청자의 색상과 디자인은 중국의 사신이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던 것이다.

고려시대 도자기의 특징은 청자의 비색(翡色), 상감 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에 있다.

첫째, 비색은 청자의 푸른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비색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청자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만들어지며 송대에 와서 그 전성기를 이룩하고 고려청자는 송 청자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나 청자의 발색 효과는 송 청자와는 다른 푸른색을 개발하였다.

중국에서는 도자기의 푸른색을 가리켜 비색(秘色)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고려인들은 독자적으로 비색(翡色)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중국의 청자색과는 다르다는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분청사기시대인 전기와 청화백자시대인 후기로 규정지을 수 있다. 백자를 선호하는 명의 영향으로 백자가 주를 이루었으며, 조선자기는 그릇의 실용성과 견실성을 강조, 장식적인 기교가 거의 없다. 조선시대 도자기는 전기에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되며, 중기와 후기에는 백자만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분청사기는 그 기형이 풍만하고 대담, 익살스러우며, 문양은 새로운 사실적 문양을 대담하게 생략 변형하고, 단순화시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깊고 드높은 조형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는 그릇 표면을 백토로 분장(화장)하여 전체적으로 백색을 띠며 유약을 바른 후의 색조는 회청색을 띠는 도자기이다.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 생산되었고 15세기 전반 세종의 재위시기에 가장 다양하게 발전하여 전국에서 생산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우는 백토분장기법과 그 무늬에 있다.

분청사기의 발전은 백토분장이 보다 많이 되어 표면색이 백색으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백자와 같이 표면이 희게 되었을 때는 백자와 같아, 16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의 일부는 백자에 흡수되고 일부는 백자와 같은 질의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일본의 도자기

오늘날 일본의 도예는 세계 최고로 칭송받고 있다. 이러한 일본 도예의 시조는 이참평으로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이다. 그가 아리타 지방의 도산신사에 모셔질 정도로 추앙 받고 있는 이유는 1616년 일본 최초로 자기를 구울 수 있는 백토를 발견해 자기 굽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리타의 자기, 이로에 자기는 나베시마 가문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다. 이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전해진 일본의 자기는 이마리야키로 불리며 일대 선풍을 일으켜 독일의 마이센자기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도기가 만들어진 것은 가마쿠라 시대로 세토의 가토시로가 남송 유약기술을 도입, 세토야키를 일으키고 무로마치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쳐 각양각색으로 성장하던 도예문화는 도요토미히데요시와 센노리큐의 다도문화를 만나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으로, 이참평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일본 도예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천대받는 도공인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적국에서는 귀족의 예우를 받으며 자기 굽기에 몰두할 수 있었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 일본의 도자기는 명실 공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의 도예 작가들은 전통의 보존과 그것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가장 일본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감각과 안목을 가진 많은 작품들을 창조해 내고 있다.

한국 고고학의 대가인 김원룡 선생은 중국도자기가 장대하고 완벽하게 잘 차린 경극의 배우 같다면, 일본도자기는 화려하게 꾸민 기생과 같고, 한국도자기는 수수하게 차린 가정주부와 같다고 비교하면서, 때문에 중국도자기는 보기에 좋고 일본도자기는 사용하기에 좋지만 한국도자기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싶어지는가 보다고 말했다.

2020년 5월 15일, 1171호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