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의 광장(4)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에 가보면

지중해에서 배편으로 흑해를 여행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 있다. 32 킬로 미터의 그리 길지 않은 협곡으로 폭은 더욱 좁은 750 미터 폭의 좁은 협곡, 바로 보스포로스해협이다. 이곳을 배편으로 여행하면 다른 선상 여행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는 달리 미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른쪽을 바라보면 바로 한 걸음에 다을 수 있는 곳이 아시아의 끝, 이른바 소아시아이며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유럽의 종착역으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이다.

오른편은 멀리 중국 한나라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실크로드의 무역상들이 고비 산맥과 투루판, K2 고봉을 넘어 지금의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을 거쳐 머나먼 육로 길의 여정을 마친 곳이다. 이곳에서 상인들은 여정을 풀고 가지고 왔던 상품들을 다시 배편으로 실어서 로마로 향하는 곳이었다.

반대편은 1883년에 시작된 유럽 최고의 대륙횡단열차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종착역인 콘스탄티노풀이다. 이 열차가 호화롭고 안락한 시설을 갖추고 낭만과 동경을 불러 일으키며 파리를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 유럽을 다 거쳐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곳. 콘스탄티노풀이라는 도시였다.

유럽과 동양의 만남. 그 기구한 역사는 벌써 200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른다. 오랜 역사 가운데 가장 기억 할 만한 두 가지 사건 가운데 두 번째 사건은 1453년 이슬람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다. 이 사건은 서양 역사에서 로마제국 멸망이라는 대 타이틀로 뼈 아프게 기록 되는 사건이다.

이것으로 오래된 도시 콘스탄티노풀은 이스탄블로, 기독교 세력의 본거지는 이슬람의 주 도시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계기를 가져온다.

콘스탄티노플은 1100 여 년만에 이스탄블로

1100 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비잔틴제국에 결정타를 가한 사람은 오스만 제국의 7대 황제 메흐메드 2세 였다. 훤칠한 키에 턱수염에 터어반을 두르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을 때가 약관 21세였다. 역사적인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기록한 대형그림이 1855년에 지은 돌마바흐체 궁전에 걸려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에 걸린 유화를 보면 터어반을 두르고 백마 탄 메흐메드 2세가 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특이한 것은 함대가 육지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언덕 위에 궤도를 깔고 수많은 사람과 소떼들이 배를 끌고 있는 모습이다. 보스포로스 북쪽에 있는 베이오울루구에서 육지를 통해 구시가지 북쪽의 골든 해협 안쪽으로 배를 옳긴 것이다.

그토록 잘 견디어 오던 동로마제국은 결국 무너졌다. 역사가들의 표현대로 라면 󰡐잘 익어가던 감󰡑은 결국 떨어진 것이다. 1453년 5월 29일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백마를 타고 파리시오스 문을 통해 입성한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 성전을 모스크로 개조했고 성전 뒤에는 이슬람 술탄의 궁전 톱카프 궁전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서방으로 눈을 돌린 메흐메드2세 덕분에 이스탄불은 짧은 시간 만에 다민족 국가, 다문화 국가로 변모 했다. 그리고 100년 후에는 이슬람 모스크를 대표한다고 하는 블루 모스크가 만들어 졌으며 이와 유사한 모스크들이 수없이 설계되고 건축되었다.

그 후 300년 후에는 유럽 최후에 지어진 로코코 양식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진다. 서방화 하기 시작한 오스만 투루크제국 정책의 완결판이다. 또 1863년에는 서방으로 향하는 최대의 역 시르케지 역이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20 년후 1883년 10월 파리에서 출발한 특급열차 오리엔트 국제 특급열차가 시르케지역에 도착한다.

이슬람제국 600년 동안 가장 화려한 시대는 10대 황제 대 쉴레이만 (제위 1520-1566)시대이다. 이때에 아랍권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건축가가 등장한다. 미마르 시난이다.

미마르 시난은 동방의 미케란젤로

아나톨리아의 벽촌, 초라한 촌부의 아들로 태어난 미마르 시난(1486-1587)은 어린 시절 목수일을 배우며 자란다. 그는 보병 정예 부대에 입대한 후 도로와 교랑을 건설하는데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다. 진급을 거듭하면서 야전사령관이 된 후에는 이스탄불과 에디르네를 연결하는 도로 중 늪지를 가로지르는 뷔위크체크미체 다리를 건설한 공로로 장군까지 승진한다.

시난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장군에서의 예편은 시난 일생에서 그의 천재적 건축 기술을 선보일 기회의 시작이었다. 바로 궁정 건축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시난은 이스탄불의 수많은 모스크를 짓기 시작했고 당시 시난의 재주를 알아본 대 쉴레이만은 시난 일생의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그의 재위 시절 시난을 통해 만들어지는 모스크들은 현재 터어키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모스크는 쉴레마니에 모스크이다.

53m 높이에 지름 27m의 거대한 돔을 얹어 놓은 쉴레마니에 모스크는 골든 혼 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본당은 가로가 69미터, 세로가 63미터의 규모이다. 돔 주변에는 33개의 창문이 있고 빛이 들어와 내부에 어둡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준다. 안에서 올려다 본 돔의 인상은 주변에 아라베스크 문양과 더불어 경건하면서도 상쾌하기까지 하다.

시난의 재주는 끊이지 않는다. 대 쉴레이만의 노예출신 두 번째 부인 록셀란 흐렘의 요청으로 복합문화단지 쿨리예(Kulliy)를 지었고 일찍 사망한 대 쉴레이만의 아들 메흐메드를 위해서 쉬자데 메흐메드 모스크도 완성한다. 이 모스크를 시발점으로 다수의 모스크가 세워지는데 가장 큰 모스크는 대 쉴레이만 사후 셀림 2세때 세워지는 셀림 2세의 모스크이다.

에디르네에 있는 이 모스크는 지름 31미터의 거대한 돔으로 하기아 소피아 돔과 견줄만하다. 시각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면서 숭고한 공간을 잘 표현하고 있어 시난 작품의 결정판이라고 후세에 평가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건축과 조각의 천재인 미겔란젤로 부로나오티가 활동한다. 동시대인으로서 두 사람 다 장수 하면서 당대의 최고의 천재이며 후대까지 비교할 천재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미마르 시난은 동방의 미켈란젤로라 해도 손색이 없다.

모스크를 지을때 가장 핵심되는 기술은 거대한 돔을 지탱하는 기술이다. 미마르 시난은 그 핵심구조의 원리를 1000년 전 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전에서 원리를 배웠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시절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하기아 소피아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그리스출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로스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에 비잔티온에 최초로 식민 도시를 건설한 사람도 그리스의 장군 비자스와 안데스였다. 결국 이스탄불의 도시 건축문화의 시발점은 󰡐그리스였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편에서는 그리스로 눈을 돌려보자.

사진: 쉴레마니에 모스크. 완벽한 균형과 안정감이 돋보인다. 큰 돔 주위에 작은 돔이 둘 러 쌓인 모습은 후에 이슬람식 모스크의 양식이 되어 버렸다.

2020년 6월 19일, 1175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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