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간의 움직임을 통한 아름다움의 창조:
현대무용 ④

– 현대무용의 거장들(2)

피나 파우쉬(Pina bausch)

탄츠 테아터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피나 바우쉬는 에센 폴크방 예술대학과 미국 줄리어드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1973년 부퍼탈 시립무용단의 예술감독 겸 안무가로 취임했으며, 연극과 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탄츠테아터’라는 혁신적인 장르를 발전시킴으로써 20세기 최고의 무용가 반열에 올라섰다.

부퍼탈 시립무용단 단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부퍼탈 탄츠테아터로 개명하고 발레단 스타일을 현대무용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1970년대 말, 피나 바우쉬와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작품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는데 수백가지의 의문들을 무용수들로 하여금 언어 혹은 비언어적인 내용으로 해답을 제시하게 만들었다.

피나 바우쉬는 한 작품을 가지고 여러 달 동안 작업하고 초연 후에도 고치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하였는데, <카네이션>을 비롯한 유명작들은 여러 차례의 공연을 통해 보완되어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점차 거듭나게 된다.

25년동안 독일 무용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지켜온 피나 바우쉬는 2001년 스페인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엔딩에 자신의 대표작인 <카페뮐러>와 <마주르카 포고>를 직접 연기하며 전세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9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봄의 제전>, <푸른 수염>,<카페 뮐러>, <카네이션> 등의 수많은 작품들을 남긴 피나 바우쉬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깨고 예술을 삶의 영역으로 한차원 더 확장시킨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테마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현대사회와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을 그려낸다. 사랑과 욕망,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슬픔과 고뇌, 폭력과 파괴 등과 같이 인간의 실존에 관한 심오한 주제들은 고정된 체계가 없는 자유로운 형식에 담겨진다.

그녀의 작품에는 흔히 평가기준이 되는 지속적인 플롯이나 특정한 캐릭터, 일관된 의미가 없다. 어떤 상황이나 소품, 의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대화와 행동의 에피소드, 그리고 사운드와 이미지가 변화무쌍하게 조합된 그녀의 작품은 그 자체를 즉각 감성과 영혼 앞에 드러낸다.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면서도 강한 어휘의 몸짓을 구축해내는 피나 바우쉬는 자연을 소재로 구성한 획기적인 무대로 관객들의 시선을 잠시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작품에 따라 무대에 새로운 물질을 깔아놓는 것으로 유명한데,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물이 차고, 쓰레기와 흙더미가 쌓이며,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으로 뒤 덮히고, 모래사장 위에 난파선이 등장하고, 거대한 바위 절벽이 놓인다. 그 위에서 사나운 독일 셰퍼드가 짖어대고, 양이 고요히 배회하며, 살아있는 닭이 수박을 쪼아 먹고, 무용수들은 뒹굴고, 첨벙대며, 나무에 오르거나, 바위 위를 기어 다닌다. 흙과 물, 잔디와 꽃, 동물과 같이 자연에서 가져온 배경과 소품들은 독특한 색과 향기 그리고 촉감으로 무뎌진 감각을 자극하며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접촉의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접촉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모습들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피나 바우쉬는 춤,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탈 장르양식 ?탄츠테이터?로 20세기 현대무용의 흐름을 바꿨다. 이에 걸맞게 그에게는 현대 무용의 거장, 또는 세계적인 안무가라는 호칭들이 붙어 다닌다. 피나 바우쉬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문제보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끓어오를 듯 강렬한 사랑과 욕망, 극심한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가슴을 에이는 슬픔과 고뇌 등 인간 실존에 관한 주제들이 특별한 양식과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출되고 있다.

홍신자

홍신자는 안무가이자 무용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가이기도 하다.

20세기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중국 국립무용원의 외국무용연구부장이자 무용평론가인 우장핑은 홍신자를 이사도라 덩컨, 니진스키, 마사 그래함 등과 함께 ‘동양 전통에 뿌리를 둔 서양 아방가르드 무용의 꽃’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1998년도 독일 순회공연 당시에 무용 평론가인 레이멘은 ‘홍신자는 한국의 피나 바우쉬 같은 존재이며 미국과 한국에서 유명한 무용가이다.’ 라고 와이마 OTZ 신문에서 언급했다.

무용가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27살에 처음 무용을 시작한 홍신자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호텔경영을 배우기 위해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그녀는 우연히 알윈 니콜라이 무용단의 현대 무용 공연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본 현대 무용이었지만 그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그녀는 그 길로 무용에 빠지게 된다.

약 8년의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한 끝에 홍신자는 1973년 뉴욕에서 ‘제례’라는 공연을 올리게 됐다. 무대 중간에 제사상을 놓고 자신의 모든 과거와 언니의 죽음, 인간의 운명, 여인의 슬픔, 한국 역사의 한을 태우는 의식을 무용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후 뉴욕 타임즈 등에 기사가 실리는 등 많은 비평가에게 호평을 받으며 드디어 무용계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게 됐다.

홍신자는 무용가로서 가장 높은 곳에 서있을 때 갑자기 인도로 떠났다. 진정한 자유와 꿈을 찾아서였다. 그곳에서 인도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한국인 첫 제자로 지내며 힘겨운 구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용을 통해 자유를 찾고, 웃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3년 후 무용가로 복귀한 홍신자는 ‘구도의 춤꾼’으로 다시 무용계에 큰 획을 그게 되었다. 1981년 뉴욕에서 돌도 웃는다는 뜻의 무용단 ‘웃는돌(Laughing Stone)’을 창단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20년 이상 활동하면서 존 케이지, 유지 타카하시, 마가렛 렝 탄, 백남준 등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중국 베이징 댄스 아카데미의 객원교수,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한국 각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93년에 한국에 영구 귀국한 뒤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객원교수로 무용을 지도하는 한편 1995년부터 매년 안성 죽산국제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1982년 ‘오늘의 여인상’, 1989년 ‘중앙문화대상’, 1996년 ‘김수근 문화상’, 1997년 ‘우경문화예술상’, 200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미국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Hawaii State Foundation on Culture and the Arts, Asian Cultural Council, Japan Foundation 등 미국과 일본의 주요 기관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녀의 자전적 저서 ‘자유를 위한 변명’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번역, 출판된 베스트셀러이다.

2020년 7월 3일, 1177호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