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독일의 현대건축 ②

문화사업단은 독일의 현대건축을 주제로 4회에 걸쳐 유겐트스틸, 바우하우스(Bauhaus), 제3제국시대의 건축에 관해 살펴보게 된다.

‘현대’라는 단어는 시대구분에 있어 가장 모호한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정의내려진 바 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양식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의 양식이 이어져 올 경우 크게 1900년대 전체를 ‘현대’라는 시기구분 용어를 사용하는 예에 따라 문화세상에서는 190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온 독일의 건축양식을 현대 독일건축이라 칭하며 살펴보도록 한다.

바우하우스(Bauhaus)

1차 세계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 이듬해인 1919년, 아르누보(신예술)의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만든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합병되어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hius)가 취임하였다.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종합조형학교로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는, 1925년 데사우로 옮겨지고, 1933년 나치의 정치적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14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존속한 바우하우스는, 그러나 당대 유럽의 창조적인 예술운동과 세계 디자인 활동의 최고 중심지가 되면서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세대에 출현하는 그래픽 디자인, 내부 디자인, 공업 디자인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운영되었는데, ‘사회 지향적 체계’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하였다. 이러한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건축과 산업에 있어서 보다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제품 또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육이념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건축물과 공예작품들은 청교도주의적인 단순하고 검소한 제품을 선호하게 되고 값싸게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사각형 형태의 디자인 제품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역사적인 배경과 근본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공작의 세계와 창조적인 예술가를 재결합시키는 길이 모색되었고, 바우하우스 역시 그것을 계속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적 창조성을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하며, 모든 예술분야 ― 조각, 회화 , 디자인, 수공예 등 ― 을 하나의 새로운 건축으로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건축에 결합되는 모든 예술적 창조활동의 통일감을 목적으로 하며, 모든 공예부문을 새로운 건축의 불가분의 구성요소로 재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교육은 조형적 창조의 실습과 지식의 두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각 공장에서의 실기 교습을 위주로 하는 공작교육과 관찰법, 표현법, 조형론 등을 훈련하는 형태교육으로 이분되었다.

일반적으로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시대적인 특성에 따라 4기로 구분한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시대로서 수공예가를 양성하기 위한 일반적인 공예학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데사우로 이전한 이후 1925년부터 1927년 까지는 산업 전반에 디자인적 관점과 해결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현대의 디자인 대학 형태를 갖추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좌익성향의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교장으로 있던, 1928년부터 1929년까지의 기간 동안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에 놓이게 되고, 그는 결국 시 정부에 의해 해임된다. 마지막 시기는, 건축가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의 시대로 건축공과대학 정도로 그 규모와 역할이 축소되어 다시 탄생되는데 1930년부터 1933년까지가 이 기간에 해당한다.

바이마르에서 출발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 (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 (Lyonel Feininger), 파울 클레 (Paul Klee), 오스카 슐레머 (Oskar Schlemmer),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등 신예 예술가들이 초빙되어, 공업과 예술을 결합시켜 새로운 건축과 새로운 공예를 만드는 연구가 시도되었다.

초기에는 공예학교 성격을 띠다가 1923년에 이르러서야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 성과를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교육방침이 정착되어 바우하우스의 특색으로 자리 잡았는데,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간 기초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그림·직물·인쇄의 각 공방으로 진급한다. 거기서 형태교사에게 조형 이념을 배우면서 공작교사에게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로 부른다.

이 시기부터는 이미 종합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였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바이마르 시절의 졸업생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계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6년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校舍)로,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가 잘 나타난다. 그리고 19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도 기여한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일반인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건축이 모든 의미의 미적 과정이라고 역설하였다.

19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 관계가 좋지 못하여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1933년 나치정부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망명 교사나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으며, 1955년에는 바우하우스 졸업생 막스 빌(Max Bill)이 다시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2020년 7월 17일, 1179호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