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독일의 전후 문학 (6)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②

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은 독일어권의 전후 문학으로, 1, 2차 세계 대전을 치른 독일어권의 문학계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4명의 작가를 선택하여 살펴본다.

작가에 따라, 인간 본연의 모습에 천착하거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고, 또는 과거 불행한 시대에 대한 고발 등 다양한 형태로 작품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 모든 근원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뒤 ?과연 인간의 이성은 진보하며 신뢰할 수 잇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막스 프리쉬, 뒤렌마트,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를 탄생 연도순으로 연재한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②

지난호에서는 귄터 그라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그라스의 대표작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북(Die Blechtrommel)

『양철북』은 오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성장을 멈춘 한 소년의 이야기다.

세 살 때 스스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성장을 중지시킨 오스카는 목에 양철북을 걸고 산다. 키가 94㎝인 그는 어른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인의 사회에서 소외됐지만 동시에 모든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오스카의 시선은 냉정하다. 오스카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평범한 소시민이 어떻게 나치즘에 물들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평범한 시기에는 선량하면서도 가끔은 약아빠진 삶을 살던 사람들이 격변이 일어나자 잔혹하고 난잡한 군중으로 변해간다. 바람을 피우고, 식탐에 매달리던 사람들은 나치가 집권하자 군중집회에 나가 환호성을 지르는 집단으로 변질된다.

소설 속에서 오스카의 저항 방식은 북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가 저항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근처의 유리창들이 깨질 뿐이다. 재미있는 건 오스카의 역할이 관찰자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때로는 오스카도 이 같은 광기의 세월에 동참한다. 흡사 그라스 자신의 과오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소설은 3부로 구성돼 있는데 전쟁이 끝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서른 살쯤 된 오스카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제부터 그는 전쟁 후 자신이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대해 보고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말을 하게 되었고, 서툴긴 하지만 쓸 수도 있게 되었으며, 유창하게 읽을 수도 있다…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제부터 성인의 삶을 시작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

당사자인 오스카는 이렇게 자신이 성인이 됐음을 선언한다. 독일인들이 지나쳐온 그 시기가 유아적인 광기의 나날이었음을 반성하듯이. 어쨌든 그라스의 과오는 ‘양철북’이라는 시대의 고백을 탄생시켰다. E. H. 카의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의 끝없는 대화”다. ‘양철북’은 그라스가 과거와 나눈 대화다.

넙치(Der Butt)

1977년에 발표되어 귄터 그라스만의 독창성이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넙치』는 출간 후 2년 동안에만 45만 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중세, 바로크 시대, 절대 왕정기, 혁명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움직여온 넙치와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들이 엮어낸 또 하나의 역사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작품으로 성(性)과 요리, 신화와 문명에 대한 성대한 만찬이 펼쳐진다. 작가는 쉰 번째 생일을 맞기 5년 전 자신을 위한 선물로써 대작을 쓰기로 결심하고 시, 스케치, 짧은 에피소드 등을 통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뒤셀도르프 및 베를린 예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그는 『넙치』와 관련하여 상당량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텔크테에서의 만남(Das Treffen in Telgte)

귄터 그라스 자신이 회원이었던 1947년의 ’47그룹’ 모임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1947년을 1647년도로 바꾸어 17세기에 실존했던 시인들인 그뤼피우스, 게르하르트, 질레지우스 등을 등장시켰다.

신, 구교 세력 간의 갈등이 전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30년 전쟁(1618~1648)이 막바지를 향하던 때, 일군의 시인들이 독일 각지로부터 시골 마을 텔크테로 몰려든다. 시인들의 목적은 산산조각으로 분열된 조국을 마지막 남은 수단인 ‘언어와 문학’으로 다시 한 번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의 참상 속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와 평화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려 했던 시인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에 말려들면서 자신들의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 (Beim Häuten der Zwiebel)

귄터 그라스의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는 작가의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기록이 담겨있다. 온갖 풍파로 가득했던 2차 세계 대전 시기와 전후 격변기를 견디며 『양철북』이라는 거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라스는 이 책을 통해 열일곱 살에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징집당해 복무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양파 껍질을 벗기며』는 2006년 출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의 작가가 치기 넘쳤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1940~1950년대 역사적 격변기의 유럽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암실 이야기 (Die Box, Dunkelkammergeschichten)

2006년 뼈아픈 자기 고백을 담은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발표한 귄터 그라스가 다시 한 번 성공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써 내려간 실험적 자전 소설이다.

유명한 사진사인 마리가 이제는 성인이 된 자신의 여덟 아이들에게 자신과 그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한다는 설정으로 전개된다. 마리는 그라스 자신이 투영되어 있는 인물이다.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 형태를 취하지만 작품 속 기억과 인물은 그라스의 실제 경험과 오버랩 된다. 아이들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그 자신의 삶을 두서없이,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1186호 23면, 2020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