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예술 특구 Kunstareal ③

베를린에는 박물관 섬(Museuminsel)dl 있고, 프랑크푸르트에는 박물관강변(museumsufer)rk 있다면 뮌헨에는 쿤스트아레알(Kunstareal)이 있다.

뮌헨의 Maxvorstadt 구에 위치한 쿤스트아레알은 66헥타의 방대한 면적에 고대 미술에서 부터 21세기 현대 미술의 컬렉션까지 16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한 곳에서 둘러 볼 수 있다는 점이 쿤스트아레알의 매력이다.

16개의 박물관분만 아니라 40여개의 갤러리, 6개의 대학 그리고 Pinakothek 주변의 조각 공원 등, 쿤스트아레알은 뮌헨을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예술특구이다.

쿤스트아레알은 북쪽의 Heßstraße, 동쪽의 Türkenstraße, 남쪽의 Karlstraße, 서쪽의 Richard-Wagner-/ Enhuberstraße에서 시작되어, 뮌헨 어디에서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 쉽게 닿을 수 있을 만큼 접근성도 뛰어나다.


Lenbachhaus : 청기사파의 작가들의 고향

Lenbachhaus는 Franz Marc, Wassily Kandinsky, August Macke, Paul Klee, Jawlensky 및 Gabriele Münter의 작품들을 소장한 세계 최대 규모의 “청기사파(“Blauen Reiter)”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청기사파는 뮌헨에서 발생한 화풍으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활동한 표현주의 화풍 중 하나로, 대표적인 화가는Wassily Kandinsky, Franz Marc, August Macke, Paul Klee, Jawlensky 등이 있다. 이들은 Ernst Kirchner 등이 결성한 다리파( Brücke,1905~1913)와 함께 유럽에서 표현주의의 정착에 기여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한 1914년 Kandinsky가 러시아로 소환되고 같은 해 Macke가 상파뉴 전선에서 사망, 1916년 베르덩 전선에서 Marc가 사망하면서 살해당하면서 청기사 파는 그 종말을 맞았다.

청기사파는 푸른 색에 대한 선호와 기사의 낭만적 상징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1912년 피퍼 서점에서 <청기사> 잡지를 발간하며 그 이름을 얻게 되었고, 색과 추상을 통해 내면적 진실을 표현할 것을 추구했다. Marc마르크에게 말을 비롯한 동물은 순수한 영혼성을 대표했고 Kandinsky는 푸른색을 현대의 물질주의에 대항하는 시원의 색으로 보았다.

Lenbachhaus의 탄생

독일 화가이기도 했던 Franz von Lenbach는 Königsplatz 근처에 별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뮌헨 건축가 Gabriel von Seidl과 함께 대저택을 구상하였다. 1887년부터 1891년까지 L 자형 대저택이 지어졌는데, 이는 작품활동을 하는 아틀리에 동과 생활 거주 동이 함께 하는 형태였다. 대저택 앞 정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정원으로 꾸며졌다. 내부는 골동품, 조각, 그림과 카펫으로 장식되었다.

1912년에는 아틀리에와 본관의 건물이 연결되었고, 1924년 Lenbach의 미망인은 건물과 예술작품들을 뮌헨 시에 매각하였다. 이후 뮌헨 시는 1827년 아틀리에 건물 맞은 편 북쪽에 또 다른 건물을 지었고, 1929년 Lenbachhaus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전쟁 등 수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양쪽 날개 끝부분만 전시장으로 사용하다가 1952년 전면적인 수리를 끝내고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문을 닫았는데, 1957년 Kandinsky의 예술적 동지이자 연인 Gabrielle Münter가 이곳에서 전시회를 가지면서 미술관이 제 기능을 되찾았다. 이를 계기로 청기사파의 다양한 작품들이 기증되면서 청기사파 작품들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Lenbachhaus가 청기사 작품들의 전당이 되기까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청기사파는 자연 해산되고 러시아인 Kandinsky는 독일을 떠나야 했다. Kandinsky는 Münter와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끝내 약속을 저버리고 1917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장군의 딸과 결혼하였다.

사제지간이자 연인이었던 Münter와 Kandinsky가 함께 살았던 바이에른 무르나우(Murnau)의 집은 “Münter Haus”가 되었다. 칸딘스키가 러시아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재혼을 하자 뮌터는 칸딘스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대쪽 같은 기개로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그림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뮌터는 생애 마지막까지 무르나우에서 살았고, 1962년 85살의 나이로 무르나우에서 생을 마감했다.

1957 년 Gabriele Münter는 80회 생일을 맞아 전시회를 갖고 Kandinsky와 Münter 자신의 수많은 작품과 청기사파 동료들의 작품을 Lenbachhaus에 기증하였다. 이 기증을 통해 Lenbachhaus는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을 발돋움하게 되었다.

Kandinsky, Münter와 함게 청기사파를 창시한 부부가 있었는데 바로 야블렌스키와 그의 부인 Werefkin이다.

Werefkin의 아버지는 제정 러시아군 총사령관이었다. 여성이 화가가 되기 쉽지 않았던 시대에 딸을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러시아의 렘브란트’라고 불릴정도로 뛰어난 Werefkin은 Jawlensky 만난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4년 연하였던 Jawlensky는 무일푼 사관생도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함께 뮌헨으로 달아나 함께 살았다. 그녀는 Jawlensky가 자신보다 화가 자질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연금 덕분에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붓을 놓고 주부가 되어 Jawlensky를 뒷바라지했다. 부부가 되면 성(姓)이 바뀌어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마음만으로 지냈다. 두 사람은 뮌헨에서 칸딘스키와 뮌터 커플을 만났고, 네 사람은 표현주의의 대표적 유파인 “청기사파”를 창시하는 중심이 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연금은 끊긴다. 그녀는 엽서와 삽화를 그려 Jawlensky를 부양하였다. 그런데 Jawlensky는 하녀 Hellen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Werefkin과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결국Jawlensky는 Werefkin을 뮌헨에 남겨두고 Hellen과 비스바덴으로 떠난다.

혼자가 된 Werefkin은 스위스 마조레 호숫가의 아스코나에 새로운 거처를 만든다. 호수는 안정을 되찾게 해주어 그녀는 다시 붓을 들어 새로운 회화를 시작한다. 그녀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일생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의적인 회화 세계를 창조하였다.

이렇듯 Lenbachhaus에는 두 여인의 서글픈 이야기가 함께 하고 있다.

2020년 9월 25일, 1188호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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