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➀ 삼원삼재(三園三齋)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 삼원삼재(三園三齋)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로 흔히 ‘삼원 삼재’ 여섯 사람을 꼽고 있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꼭 이 ‘삼원삼재’로 한정시켜 가늠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나, 삼원삼재를 건너뛰고서 정녕 조선시대의 회화사를 따로 설명할 길이란 없을 뿐더러, 사실상 이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회화를 가장 넓게 깊이 절약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세평에 준한 그런 상징성을 결코 무시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삼재는 자신들을 뒤따라오게 될 ‘삼원’, 예컨대 단원·혜원·오원과는 달리 저마다 당대 명문 사대부 출신이었다. 더욱이 이들 ‘3재’는 오랫동안 답습되어 내려오던 중국 화풍을 과감히 청산하면서, 일찍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여 비로소 우리 회화의 변별력을 제시해냈다.

그리하여 이들 ‘삼재’에 의해 새로이 구축된 우리 회화는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져 정조 시대 이후에는 우리 회화의 보편적 경향으로 확산되면서, 다시금 ‘삼원’이라는 비길 데 없는 예술세계를 낳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들 ‘3원’은 이미 선대 ‘삼재’가 이룩해 놓은 우리 회화의 변별력 위에 보다 외연을 뚜렷이 확장시켜 더욱 그 빛을 발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삼원삼재’ 가운데 관아재 조영석보다는 굳이 공재 윤두서를 꼽는 데는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있다. 세간의 평가에 준하여 흔히 ‘삼원삼재’를 언급할 때 혹자는 관아재를 손꼽기는 하나, 또 혹자는 공재를 그 자리에 대신 손꼽기도 한다.

그러나 겸재와 관아재가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며 두 사람 모두 같은 화풍에 근거한 진경산수화를 그려 남기면서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겸재 정선과 관아재 조영석을 함께 묶어 겸재를 대표로 내세우고 있다.

그에 반해 공재는 이들과 전연 색다른 화가의 길을 전개해 나가면서, 겸재나 관아재의 예술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를 펼쳐보였다. 그가 그려 남긴 〈동국여지지도〉와 같은 지도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유하백마도〉와 〈나물캐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처음으로 풍속화다운 풍속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 아니라 공재의 〈자화상〉과 같은 초상화는 우리나라 회화 사상 최초의 자화상이면서, 초상화 가운데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사업단에서는 삼원삼재의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차례로 살펴보며, 아울러 관아재(觀我齋) 조영석도 소개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삼재’를 가리도록 해 본다.

겸재 정선: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붓 하나로 펼쳐 보인 조선의 화가.

인왕제색도: 1751년 겸재가 75세 때 비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바로 그 자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인왕산 앞 지금의 효자동 근처에서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로 사경한 작품이다.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1676~1759)은 산의 나라 한국,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산에서 해가 뜨고 산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사는 ‘산의 나라’한국에서 살아온 사람 가운데서, 처음으로 이 땅의 산을 그린 화가이다.

겸재 이전의 조선조 화가들도 산을 그렸고 산수화를 그렸지만 겸재가 등장하던 17세기 말엽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회화는 중국회화의 아류로서 중국화를 모본으로 그걸 그대로 본뜨는 임모(서화의 원본을 보면서 그대로 베끼는 것)또는 그것을 흉내내는 방작(모방한 작품)이 고작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회화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도화서(조선 시대에,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에서는 중국의 궁정화파인 이른바 원체화류의 화제와 화법을 그대로 본받아 그리는 것이 당시 관화의 주류가 되고 있었다. 비록 한국의 화가가 그리기는 했으나 그림의 주제도 중국적이요, 그림의 기법도 중국적이었던 것이다.

겸재는 원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연로하여 10대에 이미 도화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중인이나 상인계급 출신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리는 그림의 화풍이 겸재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양반 출신으로 도화서원이라는 기술직을 맡은 겸재는 그렇기에 꼼꼼한 필치로 외형 묘사에만 주력하는 직업적 화가들의 공필 보다는 일반 사대부들이 여가로 그리는 남종화풍의 문인화에 더욱 끌리게 된 듯싶다.

정선 그림의 특징은 ‘진경산수화’라는 것이다. 진경산수란 화가가 직접 풍경을 대면하고 그려내는 실경산수와 비슷한 것인데, 정선의 그림이 실경산수와 다른 점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다가 작가의 감흥을 더하여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당시 화가들은 방안에 앉아 종이나 비단을 펼쳐 놓고 상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려내었는데, 정선은 산이나 강가 등 멋진 풍경을 직접 찾아가, 눈앞에 두고 붓을 들었고, 바로 이 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정선만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선 그림의 특징의 또 하나는 조선회화 최초로 조선인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화가들은 풍경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중국의복을 입은 중국인만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선은 그림 속 풍경을 조선의 산천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산천을 거니는 사람들도 조선인으로 하였다. 가장 완벽한 조선의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세계 유수의 화가들 못지않은 열정과 실력으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낸 화가, 정선!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나 이른바 환쟁이의 삶을 살았지만, 조선의 모든 백성들과 왕에게까지 칭송 받았던 화가 정선은 왕과 친지, 지인들의 도움으로 종5품의 관직에까지 올랐지만, 그는 늘 붓과 먹, 그리고 조선의 산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1191호 23면, 2020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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