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밤(Kristallnacht): 1938년 11월 9일 밤 -11월 10일 새벽

독일 나치의 유대인 탄압의 전환점

1938년 11월 9일 밤, 유태인에 대한 폭력이 독일 전역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마치 파리에서 유태인 청소년이 독일 관리를 피살한 것에 대한 독일인의 분노에서 비롯되어 계획하지 않은 우발적인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일 선전부 장관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와 다른 나치들이 주도 면밀하게 조작한 프로그램이었다. 이틀만에 250개의 예배당이 불타고, 7,000개 이상의 유태인 상점이 폐허가 되고 약탈되었으며, 수십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 유태인 묘지, 병원, 학교 및 가정집 등이 약탈되었는데, 경찰과 소방대는 이를 방관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산산조각난 유리의 밤” 또는 “수정의 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상점의 창문 유리들이 깨져 거리에 흩어져 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었다.

19381028: 폴란드계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독일

약 1만 7,000명의 폴란드계 유태인들이 독일에 의해 추방되어 폴란드 국경쪽으로 내몰린다. 폴란드는 유태인들의 입국을 거절한다.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독일과 폴란드 접경 근처의 즈바진(Zbaszyn) 이라는 무인 지대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추방자들 중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17세 폴란드계 유태인인 헤르쉘 그륀츠판(Herschel Grynszpan)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8117: 파리에서 독일 외교관 피살

파리에 거주하는 17세 폴란드 유태인인 헤르쉘 그륀츠판이 파리의 독일 대사관 소속 외교관인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에게 총격을 가한다. 그륀츠판은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무인 지대에 갇혀버린 폴란드계 유태인 추방자들 중에 포함된 부모의 운명을 비관해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

나치는 이 암살 사건을 반유태주의를 부채질하는 기회로 이용하면서, 그륀츠판이 혼자서 결정한 일이 아니라 독일에 대한 유태인들의 광범위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폼 라트(Vom Rath)는 이틀 후에 사망한다.

1938119: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요제프 괴벨스

독일 선전부 장관인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뮌헨에서 나치당 신봉자들에게 반유태주의적인 열변을 토한다. 이날 당원들은 1923년 실패로 돌아간 맥주 홀 폭동(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려 했던 최초의 시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연설이 끝난 후 나치 관료들은 나치 돌격대(SA)와 기타 당 조직들에게 유태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가정, 사업체 및 예배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회당 및 건물의 파괴

폭도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및 수데텐란트 지역 전역에 걸쳐 267개의 유태인 회당을 파괴했다. 대중이 보는 앞에서 밤새도록 수 많은 회당들이 불탔으며, 지역 소방관들은 불이나면 건물로만 번지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다. 전국의 SA 및 히틀러 청년단 회원들은 약 7,500개의 유태인 소유의 상점들의 유리창을 파손하고 물건을 약탈했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 유태인 묘지만 골라서 훼손되었다.

독일 제국에서 가장 큰 유태인 커뮤니티가 있는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특히 파괴 행위는 극심했다.폭도들은 거리를 배회하면서 집에 있는 유태인들을 공격하고 만나는 유태인들에게 굴욕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다.

중앙 지도부에서 사망자 수를 집계하지는 않았지만, 수정의 밤으로 인해 11월 9일과 10일 사이에 최소한 91명의 유태인들이 사망했다. 이 기간의 경찰 기록에 따르면 폭동 여파로 강간 및 자살 사건의 수가 급증했다.

유태인 남성의 체포

유대인 탄입이 확산됨에 따라 SS 및 게슈타포(비밀 경찰) 부대는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따라 최대 3만명의 유태인 남성들을 체포해서 이들 대부분을 지역 교도소를 거쳐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및 기타 집단 수용소로 보냈다.

수정의 밤은 나치 정권이 민족성에 따라 유태인을 대대적으로 수감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처사로 인해 죽어나갔다. 향후 3개월간 대부분은 독일에서 이민을 떠나는 절차를 시작한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실제로, 수정의 밤의 여파로 향후 수 개월간 독일에서 해외로 유태인들을 추방시키는 절차가 가속화되었다.

19381112: 유태인 커뮤니티에 벌금을 부과한 나치

나치 제국은 독일의 유태인 커뮤니티에 10억 독일마르크의 벌금을 부과한다. 대박해 이후 유태인에게 잔해 청소와 보수 명령이 내려진다. 이 유태인들에게는 손해에 대한 보험금 지급도 금지된다. 대신, 나치 제국은 유태인 재산 소유주에게 보험사가 지불해야 하는 보험금을 가로챈다. 대박해의 여파로 인해 유태인들은 독일에서 모든 분야의 공직으로부터 조직적으로 배제된다.

반유태인 법률 제정

이후 수 주간 동안, 독일 정부는 유태인의 재산과 생활 수단을 박탈하기 위한 수 십개의 법률과 법령을 공표했다. 이런 법률의 대부분은 유태인 소유 기업 및 재산을 헐값으로 “아리아인” 소유권으로 이전하는 “아리아인화” 정책을 시행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은 공무원으로는 이미 고용 자격이 되지 않는 유태인들이 대부분의 개인적인 분야에서마저 전문 직업을 갖는 것을 금지했다. 법률 제정을 통해 공공 생활에서 유태인들의 제거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독일 교육청 당국자는 독일 학교에 재학 중인 유태인 어린이들을 퇴학시켰다. 독일계 유태인들은 운전 면허증을 보유하거나 자동차를 소유할 권리를 박탈 당했다. 법률에 따라 대중 교통의 이용이 제한되었다. 유태인들은 “독일” 극장, 영화관 또는 콘서트 홀에 더 이상 입장할 수 없게 되었다.

나치의 반유태인 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나치 제국은 향후 수 년간 독일 경제와 사회 생활에서 유태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치를 확장하고 급진적으로 진행했다. 결국 독일 제국은 강제 이주 정책으로 전환하고, 유태인 인구를 “동쪽”으로 추방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유태인이 없는” 독일(유데라인)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수정의 밤은 유태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박해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면서, 유럽계 유태인들을 몰살하려는 시도가 정점을 향해 치닫게 된다.

1194호 20면, 2020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