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④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 시·서·화의 삼절로 추앙받은 강직한 선비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은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1713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3품 벼슬인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영석은 선비화가로서는 드물게 인물화를 잘 그린 문인화가로 화명을 날렸다. 영조(1724~1776)는 일찍이 관아재가 그의 형 조영복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그 형상이 절묘하여 칭찬을 해온터라 세조와 숙종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내리지만, 관아재가 끝내 붓을 들지 않은 일은 한국미술사에 있어 유명한 일화이다.

조영석이 1725년 유배 중인 형님을 그린 ‘조영복 초상’은 당대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면 전체에 담담한 격조가 살아있으며 공식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린 작품으로 형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담긴 작품으로 유명하다.

조영석은 기술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며 사양하는 등 강한 선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화와 영모화도 잘 그렸는데, 윤두서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을 약간 가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일상적인 풍물을 소묘한 《사제첩(麝臍帖)》은 후대에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의 선구로서 주목된다. 문집으로는 《관아재고(觀我齋稿)》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설중방우〉와 〈강상조어도〉 등이 있다.

18세기 초반 겸재 정선(1676 ~ 1759)의 ‘진경산수’가 완성되는 등 사실주의 회화 경향이 뿌리를 내리면서 18세기 중엽에는 민중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에 대한 관심이 화가들 사이에서 증폭되었다.

관아재 조영석은 윤두서와 함께 풍속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는데, 관계에 진출한 선비 화가로 전형적 지식인이었지만 정계의 핵심에서 한발 벗어나 민중의 삶에도 눈을 돌렸다. 윤두서의 풍속화에 비해 인물 묘사나 형식미가 떨어지지만 윤두서가 아직 화보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반해 조영석은 ‘실사’적인 창작 태도를 강조한다.

가벼운 선과 담백한 설채를 통해 민중 생활의 순박하고 우직스런 감정들을 나타내는 것이 조영석 속화의 특징이다. ‘형상을 제대로 닮게 그리기 위해서는 복식과 사회 제도, 생활기물까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회화적 신념하에 여러 인물들의 복식과 각종 연장들까지 정확성을 기하려는 세심함이 그의 속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태도는 조영석의 말년에 가면서 현장감이 약해지고 탈속적 성향을 띠게 되지만 관아재 조영석의 풍속화는 18세기 중후반 화단에 현실 소재를 보편화시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관아재 조영석의 회화는 조선시대 후기의 윤두서나 김두량의 경우처럼 전통주의적 취향을 짙게 띠면서 다른 일면으로는 새로운 시각과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산수 인물화나 영모 또는 화조화 등에는 조선중기 회화의 전통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으면서도 소재의 선정이나 묘사에 있어서는 생활주변의 관찰에서 얻어진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풍속화적인 소재의 그림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서 후대(後代)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의 화가들에 의해 꽃피게 될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豫示)해 준다.

또한 그는 선비로서 속화장르의 개척자적 의의를 지닌다. 또 그의 <새참>, <장기>등은 서민들의 일상사를 표현한 것으로 사실정신의 의의를 더욱 깊게 해준다. 속화는 다음세대인 김홍도와 신윤복 등에 의해 절정으로 꽃피게 되지만 그 선구적 역할을 관아재나 혹은 공재와 같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의 그림은 서민적 리얼리티는 약하나 서민의 삶을 회화적 내지 선비적 세련미로 승화시킨 것으로 지식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서민적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아재가 남긴 노년의 최대 명작은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이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관아재 작품 중 가장 큰 대작으로 그 묘사의 사실성, 소재의 현실성, 인물의 조선풍, 그림 전체에 풍기는 문기(文氣)로 한국회화사상 불멸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집 주인은 학창의를 입고 있고 방문객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모두 의젓이 정좌하고 있다. 이때 창문은 닫혀 있었겠지만 화가는 그림을 위해 창을 열어놓았는데 방안에는 책이 그득하다. 이 두 인물 묘사에서 우리는 그들이 다름 아닌 조선의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이처럼 조선 그림에 조선의 선비가 정확하게 표현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 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신선. 나그네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였다.

사진1: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1194호 23면, 2020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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