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⑤ 단원(檀園) 김홍도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단원(檀園) 김홍도: 불꽃처럼 살다 이슬처럼 떠난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는 실학이 시작하던 1745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그림, 특히 신선도를 아주 잘 그렸다. 화가이며 호조 참판이었던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그 당시 화원은 집안에서 가업으로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김홍도는 그림 솜씨만으로 집안의 내력 없이 화원이 된 것으로 보아 타고난 재능을 잘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강세황에게 그림을 익혔고 20대에 이미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홍도는 창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 단원 김홍도의 〈벼타작〉

김홍도는 1788년에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기행 하면서 그 곳의 경치를 그렸는데, 그 때 중국식 화법으로 표현이 되지 않는 조선의 화강암 산과 소나무 등을 표현하는 화법(수지법·樹枝法)을 개발하였다.

그림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그림이 그려지고 있던 당시에 김홍도는 한국 지형의 특징, 화강암으로 구성된 돌산과 소나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화법을 만들어 내고 조선의 민속도를 통하여 조선 고유의 화풍을 만들어 낸 것이다.

즉 김홍도는 중국 그림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선의 지형에 맞는 화풍을 만들어 내어 중국 화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는 풍속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그 밖에 인물화, 산수화, 불화, 초상화 등 거의 모든 분야의 그림에도 능하였다.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 한다. 김홍도의 산수화는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인 예술로 표현한 것이고 서민들의 생활상을 나타낸 풍속화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그림이며 조선시대의 사회를 후대에 알리는 역사적인 자료가 되었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된다. 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 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사진2: 자화상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로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俗畵體)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200여점 이상 전해오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들로부터 조선 후기를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작품세계를 더듬어 볼 수는 있지만,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의 말년을 전해지는 기록이 전무한 가운데 우리는 그저 일반인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다 일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추측할 뿐이다. 뛰어난 천재 화가에 대한 우울한 기억에 그의 작품이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한국회화사에서 김홍도가 갖는 중요성은 그의 작품에서 간취되는 고도의 예술성, 작가적 독창성과 한국적 미감의 발현이란 점에 있다. 또 문화사적으로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건실한 사실성의 바탕 위에서 독특한 시정을 담아 재현한 진경산수화라든가, 우리 조상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과장없이 그려내면서도, 그 멋과 흥, 해학을 이끌어낸 풍속화 등에 나타난 소재의 근대적 성격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195호 20면, 2020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