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신독일영화 (Neuer Deutscher Film) ③ 빔 벤더스(Wim Wenders)

빔 벤더스(Wim Wenders)

파스빈더와 더불어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신독일영화’의 기수로 평가되는 빔 벤더스는 2차대전이 바로 끝난 1945년 8월 14일 뒤셀도르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미군의 점령 통치, 나치 잔재의 청산, 그리고 전후 복구사업으로 뒤숭숭한 서독의 50년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0대의 벤더스는 록큰롤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에 빠져 목사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뒤셀도르프의 의과대학에 진학하나 2년 만에 그만 두고 화가가 되려는 생각으로 파리로 갔다. 그러나 파리에서 영화에 심취하게 되어 1967년 독일로 돌아와 뮌헨 영화학교에 입학하고, 최초의 단편영화 <장소들 Schauplatze>을 만들었다.

뮌헨영화학교 1기생으로 영화를 정규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벤더스가 깊게 고민한 문제는 영화적 재현에 관한 이론적 문제들이었다. 그가 쓴 글과 영화에는 영상적 본질의 문제가 뿌리 깊게 스며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이미지의 힘, 이야기하기의 어려움, 지각의 변화를 둘러싸고 펼쳐진다. 초기 단편인 <장소들 Schauplaetze, 1967>과 <핀볼 게임 Same Players Shoots Again, 1968>에서 벤더스는 마치 영화에 고유한 속성들을 발견하길 원하는 것처럼 이미지의 정지와 운동을 실험하였다.

그는 항상 내러티브가, 섬세한 이미지들을 압도하게 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야기와 영상간의 자의식적인 긴장은 첫번째 장편영화인 <도시의 여름 Summer in the City 1970>에서 <멀고도 가까운 In weiter Ferne, so nah!, 1993>에 이르는 모든 작품들에 작용하고 있다.

1969년에는 카메라맨 로비 뮐러(Robby Müller)를 만나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원작을 갖고 <3장의 미국 레코드판 Drei amerikanische LPs>를 만들었다. 최초의 장편은 흑백으로 만든 영화학교 졸업 작품 <도시의 여름>이다. ****

1972년 친구인 한트케의 원작소설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 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을 신인감독 지원기금을 받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벤더스의 영화에서 여행은 중요한 모티브다. 화면 내의 이미지들이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깊숙이 감추어진 주제를 드러내듯이 주인공들은 자연과 도시를 가로지르며 삶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도시의 앨리스 Alice in den Städten, 1974>에서 앨리스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후 조부모를 찾아 여행을 떠나며, 피터 한트케의 각본에 기초한 <잘못된 움직임 Falsche Bewegung, 1975>에서 주인공 빌헬름은 방향을 상실한 채 독일 북부에서 남부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빔 벤더스는 영화이미지의 운동과 속도를 실험할 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의 역사를 운명론적으로 탐구해 나간다.

미국의 라디오 방송과 록음악, B급영화를 제2의 식량으로 섭취하며 자란 한사람으로서 벤더스는 미국대중문화가 독일의 전후 세대들에 끼쳤던 영향들을 영화 속에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일방적인 추종을 넘어서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Im Lauf der Zeit, 1976>에서 한 등장인물은 ?양키는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시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작업한 <하메트 Hammett>(1982)의 제작과정 동안 그가 할리우드 시스템의 끔찍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좀 더 분명해진다. 빔 벤더스는 <미국인 친구 Der amerikanische Freund, 1977>, <사물의 상태 Der Stand der Dinge, 1982>,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1984> 등의 영화에서 미국과 유럽 간의 긴장과 균열을 이야기하였다.

1976년 <시간이 흐름 속에서>로 깐느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1984년에는 <파리 텍사스 >로 깐느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는데, 3년 후인 1987년에는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über Berlin, 1986>로 다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1993년에는 <멀고도 가까운>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해 깐느영화제와는 인연이 깊다.

1980년대 중반, 벤더스는 베를린과 독일, 그 과거와 현재에 관한 영화인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über Berlin, 1986>를 작업하였다. 이 영화를 통해서 그는 시간과 공간의 해체,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 내러티브를 포스트모던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 이미지와 서사, 역사와 정체성, 욕망과 실천 사이의 긴장들을 담아내고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작업은 매우 일관된 스타일로 뚜렷한 성향을 보이면서도 조금씩 변모하는 반전의 과정을 보여 왔다. 주제면에서 그는 조국의 역사를 회의적인 운명론에서 실천적인 가능성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변화를 보였으며 스타일상에서도 이미지의 실험적 탐구에서 점차 이미지와 서사간의 조화로 선회하고 있다. 15개의 도시와 4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공상과학 로드무비인 <이 세상 끝까지 Bis ans Ende der Welt, 1991>에서 벤더스는 테크놀로지 환경에서 소외된 인간과 부재하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한 ?나는 이미지 생산자에서 이야기전달자로 돌아서겠다. 오직 이야기만이 이미지에 의미와 도덕을 던져줄 수 있다?라는 말은 끊임없이 갱신하고자 하는 그의 영화적 고민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2000년에 발표한 <밀리언 달러 호텔 The Million Dollar Hotel> 역시 베를린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며 그의 역량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최근 음악적 관심을 꾸준하게 영화화해온 그는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트럼펫 Ten Minutes Older : The Trumpet, 2002>에 참여했으며 <더 블루스: 소울 오브 맨 The Soul of a Man, 2003 >을 만들었다. 또한 2011년에는 2009년 타계한 탄츠테아터의 창시자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세계를 조명한 <피나 Pina>로 독일 다큐멘트 필름 대상을 수상하였다.

빔 벤더스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환멸과 저항, 미국문화를 향한 동경과 영화에의 애정 등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가치에서 출발하였지만 동시대의 헤어조그, 파스빈더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영화세계에 몰입하였다.

빔 벤더스는 전후 독일역사에 대한 회의적 운명론에서 실천적 가능성으로의 인식을 보여주는 역사에 대한 변화된 시각과 이미지에 대한 실험적 탐구에서 이미지와 서사간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하는 그는 황폐화된 인간의 내면을 쓸쓸하게 보여주는 근대를 넘어서는 현대성을 탐구하는 영화작가이다.

2020년 12월 24일 (목), 1200호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