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한국의 민화(民畵) (2)

한국 민화의 발달과정

– 종교적 염원에서 출발하여, 해학과 풍자로 대중의 정서와 욕망을 분출하다 –

한국의 민화가 언제부터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문헌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그리고자하는 욕망이 있고 또 거기에 색을 칠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바 인류회화 발달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민화란 제대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런 가식 없이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 민화의 발생은 한국회화사와 때를 같이 했다고 하겠다.

민화가 원초적 감성의 표출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한국 민화의 역사적 시원은 울주 대곡리 암각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 이문된 간단한 선 점문 등은 토기의 표면을 미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며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벽사와 진경을 기대했던 그 믿음과 마음은 정통사회의 한국 사람들이 집 안팎을 그림으로 메꾸었던 뜻과 같았다.

좁은 의미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처용문배(處容門排)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미적 욕망은 길상과 벽사라는 기복사상에서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집 대문에 붙이는 문배가 세화(歲畵)로 발전하고, 세화는 민화로 확산되었다. 세시풍속 측면에서는 문배가 민화의 시작이고, 그 문배 가운데 처용문배가 첫머리에 놓인다.

백제유물에 나타나는 산, 물, 구름, 바위, 나무등과 신라 토기, 고구려 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 대부분이 현존하고 있는 민화와 그 내용과 양식이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와 고려를 통하여 민화가 특징 지워지며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엄한 일부 유학자들이 풍속도와 같은 속기 넘치는 화법을 무시한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까닭에 속화로서 저급하게 취급을 받았다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에 이르러 민화는 그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민화가 제작되어 민화에 있어서 그 전성기를 형성하였다. 문인의 세계 속의 편안함과 민속적인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까닭에 민화는 주거공간의 장식에 필수불가결하게 수요 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약 1700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회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였다. 조선시대는 성리학과 실학의 발달로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크게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시켰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화원(畵員)과 문인(文人)들은 기존의 중국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재 경관을 대상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를 발달시켰으며, 곧이어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풍속화가 순수감상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해갔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회화의 수요층은 주로 사대부와 문인들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 생산력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회화의 제작 수요층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기존의 양반층 이외에 중인(中人)계층이 경제적으로 부상해 갔으며 서민들 중에서도 농업과 상공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 정도에 따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아갔으며 그에 따라 회화의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순수감상용 회화보다 장식용 그림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의 민화 표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 가운데 하나는, 분청사기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분청사기의 용과 호랑이의 그림이 근엄하고 권위적인 모양으로 그려진 데 비해, 민간에서 제작된 분청사기의 용과 호랑이의 이미지는 해학적이고 때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통치자 또는 권력을 상징하는 용과 호랑이를 어째서 이토록 희화했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민중이 나타내고 있는 지배계층의 권력에 대한 조롱과 피로감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 후기 민화의 발전은 신분질서와 경제구조의 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서민의 기층문화가 전면에 등장하는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서민들이 그들의 미적 취향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민화를 의욕적으로 발주함으로써, 민화의 생산과 유통은 활황을 이루게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은 민화가 가장 많이 제작된 시기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밝을뿐더러 강렬한 욕망의 분출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원초적인 본성과 기복적인 믿음에 의지하여 정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심성 기제가 발동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특징과 더불어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한국민화의 발달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민화는 유교ㆍ불교ㆍ무교가 상호 와 교호하고 습합하며, 대중의 욕구와 창작의 목적에 부응하였다. 유교이념으로 체제를 통제하였던 조선 사회에서 민화 유교문자도는 유교의 덕목을 알리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통치계층의 이데올로기에 동일시하고자 하는 체제지향적인 서민의 현실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다.

19세기 사찰의 불화에 민화 표현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불화가 민화의 소재를 수용했다는 차원을 넘어 당시 화단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단서이자, 막연하게 추정했던 민화의 유행 시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조선 후기 불교계는 후원자인 서민들의 취향에 부응하고 선교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민화를 적극 받아들인 것이다.

무속화 역시 민간에서 제작된, 서민화가가 서민의 종교적 열망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한국 문화의 한 종류라 할 수 있겠다.

민화란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민간으로 확산되어 갔던 장식 그림으로 일반 서민들의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림을 가리킨다.

민화는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숙한 기량이나 끊임없는 모방의 습성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변형을 통한 ‘새로운 형식의 창출’이다. 전자는 회화의 수요가 저변화될 때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후자는 봉건사회의 해체기라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다. 민화의 특징은 이 두가지 성격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03호 20면, 2021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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