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14)

Darmstadt: Ludwig 가의 영광과 비극이 한자리에 ⑦(마지막 회)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과 Ernst Ludwig의 발자취를 따라

◆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 가족의 비극

유럽 귀족가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가의 비극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비극이다.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의 시민들로부터 생전과 사후 가장 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루드비히 에른스트 대공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
그가 다섯 살 때, 동생 프리드리히는 집에서 그와 장난을 치다 2층 발코니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루드비히 에른스트가 10살 때인 1878년, 전염병 디프테리아가 유럽을 강타하고 그 역시 이 병에 전염된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입맞춤을 한 그의 어머니 앨리스는 이로 인해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얼마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03년에는 그의 사랑하는 딸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티프스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러시아 마지막 차르인 나콜라이 2세와 결혼한 그의 여동생 알릭스(Alix),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 세르게이와 결혼한 누나 엘리지벳(Elisabeth) 이 둘은 러시아혁명 당시 적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다.
그에게 닥친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37년 11월 16일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둘째아들 루드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의 모든 가족은 영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벨기에 항구인 Ostende 인근 상공에서 그들이 탑승한 비행기는 추락하였고 탑승객 전원은 사망하였다.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부인인 엘레오노레 대공비와 큰 아들인 게오르그 도나투스, 며느리인 그리스의 세실, 두 손주들이 모두 사망한 것이다.
사고 한 달 전인 1937년 10월 9일 사망한 에른스트 루드비히가 이 참사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일까.
이제 우리는 이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번 다름슈타트 역사산책의 마지막 목적지인 Rosenhöhe로 향한다.

  • Rosenhöhe

마틸데 언덕을 지나 Olbrichweg을 따라 약 2분정도 걸어가,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면 우리는 Rosenhöhe의 정문인 Löwentor와 마주하게 된다. 6개의 붉은 벽돌 기둥위에 여섯 마리의 사자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Rosenhöhe 정문인 Löwentor

Rosenhöhe는 말 그대로 ‘장미의 언덕’과 같이 아름다운 공원이다.
1810년 헤센-다름슈타트 공국의 공원으로 개발되었으며, 1900년에는 그 유명한 공원 내 장미공원(Rosarium)이 설치되었으며, 장미공원에서는 매 해 5월부터 11월까지 200여종의 장미에서 10,000여개의 장미 송이를 피어내고 있다. 2010년 다름슈타트 시는 Rosenhöhe 200주년을 기려 대규모 축제를 개최한 바 있다.
한편 1826년 대공 루드비히 1세는 Rosenhöhe에 대공가의 가족묘지를 조성하여 이후 마지막 대공인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그 가족들까지 Rosenhöhe에 잠들어 있다.
이들이 잠들어 있는 Rosenhöhe를 둘러보고, 에른스트 루드비히 가족의 비극을 살펴본다.

  • 동생 프리드리히의 죽음

에른스트의 동생 프리드리히(Friedrich 1870-1873)는 만 세살이 되기 전 혈우병 진단을 받게 된다. 1873년 2월 프리드리히는 놀다가 귀를 베였는데 피가 3일간 멎지 않았고, 이를 통해 그가 혈우병이라는 것 가족들이 알게 된다. 어머니인 앨리스(Alice)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이었는데, 프리드리히는 빅토리아 여왕 가계의 유전병인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5월 에른스트는 프리드리히와 어머니의 침실에서 서로 쫓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는데, 에른스트가 창문을 통해서 동생에게 가려하자, 이를 본 어머니 앨리스가 이를 제지하고, 형을 가까이 보려고 한 프리드리히는 열린 창문 근처에 있는 의자에 올라갔다가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리드리히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결국 뇌출혈로 사망하게 되는데, 만일 피가 멎었다면 살았겠지만, 혈우병 환자라 출혈이 멎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헤센 대공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프리드리히가 사고를 당할 때 곁에 있었던 어머니 앨리스 대공비와 형인 에른스트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 디프테리아로 어머니 앨리스와 막내 동생 마리를 잃다.

1878년 11월 5일 저녁 루드비히 4세와 대공비 애리스의 장녀인 빅토리아는 목이 안 좋았지만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빅토리아는 디프테리아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11월 12일에는 넷째 딸인 알릭스가 디프테리아로 진단을 받았으며 그날 오후에는 막내딸인 마리가 디프테리아로 진단받게 된다. 다음날에는 셋째 딸인 이레네가 감염되었고, 11월 14일에는 아들인 에른스트와 아버지인 루드비히 4세도 감염된다.
대공비 앨리스는 의사들과 함께 가족 모두를 돌보았으나, 11월 15일 밤에 마리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고 결국 11월 16일 아침에 마리는 사망하게 된다. 남편 루드비히 4세마저 아팠기에 앨리스 대공비는 딸의 죽음을 혼자 보아야했고 이는 그녀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앨리스 대공비는 12월까지도 아이들에게 동생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지만, 결국 아이들에게 마리의 죽음을 이야기해야 했으며, 이는 동생 프리드리히가 죽을때 곁에 있었던 에른스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에른스트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기에, 어머니인 앨리스 대공비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감염의 위험에도 입을 맞추었고, 앨리스 대공비는 결국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12월 14일날 사망한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앨리스 대공비의 아버지이자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의 기일이기도 하였다.
앨리스 대공비의 죽음은 헤센 대공가는 물론 딸의 죽음을 전달받은 빅토리아 여왕과 영국 왕실에도 크나큰 슬픔이었다. 앨리스 대공비가 죽은 후, 빅토리아 여왕은 루드비히 4세와 앨리스 사이에 태어난 외손주들을 평생 “어머니와 같은 관심”으로 보살폈다.
에른스트는 대공으로 즉위한 뒤 엘리스 기념탑(Alice-Denkmal)을 세워 어머니 앨리스를 기렸다.

  • 딸 엘리자벳의 죽음

엘리자벳은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첫 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사이에서 태어나 딸이다.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이 둘의 할머니인 빅토리아여왕의 뜻에 따라 결혼했지만, 둘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 상대였고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고, 이 둘의 불화는 유럽 귀족가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이 둘의 이혼을 허가하지 않아 억지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딸 엘리자벳을 무척 사랑한 에른스트에게는 엘리자벳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결국 빅토리아여왕 사후에야 이 둘은 이혼하게 된다.
이혼한지 2년 뒤인 1903년 에른스트에게는 또 다른 큰 불행이 찾아온다. 바로 끔찍하게 아꼈던 딸 엘리자벳의 갑작스런 사망이다.
1903년 10월 헤센 대공가의 일원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와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의 결혼식이 열렸고, 엘리자벳은 아버지 에른스트와 함께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딸 엘리자벳의 묘지

결혼식 후,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딸을 데리고 러시아 황제 가족과 함께 폴란드의 사냥터로 가는데, 도착 며칠 후 엘리자벳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한다.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자 바르샤바의 전문의를 불렀으나, 엘리자벳의 결국 사망하게 된다. 당시 의료진은 병명을 확정하지 못했으나, 현재는 엘리자벳의 병을 급성 장티푸스로 추정하고 있다.
딸을 끔찍이 사랑했던 에른스트는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딸 엘리자벳의 죽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큰 고통 속에서도 에른스트는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을 최선을 다해 꾸몄다.
장례식때 검은색 대신 모든 것을 흰색으로 바꾸었으며, 딸의 관은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수레에 실었고, 딸의 관 주변을 꽃으로 장식해 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꾸몄다. 그리고 딸의 묘는 날개를 펼친 천사가 무덤을 지켜서 보호하는 장식으로 딸의 편안함을 기원했다.
에른스트는 딸이 죽은지 30년 후에도 딸에 대해서 “그 애는 내 삶의 햇살이었다“라고 회상했다.

  • 누나와 여동생의 죽음

에른스트의 누나 엘리자벳은 1884년 모스크바 세리게이 대공과 결혼하고, 동생 알릭스는 1894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나콜라이 2세와 결혼해, 러시아로 떠난다.
누나 엘리자벳의 결혼생활은 불행하게 끝나고 만다. 남편인 세르게이 대공은 모스크바의 통치자였는데 그는 매우 인기가 없었으며,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처럼 폭탄테러로 사망한다. 이후 엘리지벳은 정교회 수녀가 되었고 집을 수도원으로 만들어서 수녀로 살아간다.
반면 알릭스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니콜라이2세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으며, 아이들도 사랑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들의 행복을 하락하지 않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황실가족 대부분은 체포된다. 그중 니콜라이 2세 황제와 그 가족들은 시베리아로 이송되었고, 수녀로 모스크바에서 살던 엘라 역시 체포되어 다른 황족들과 함께 억류되었고 결국 적군에 의해 다른 여섯 명의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한다. 그리고 다음날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 역시 처형당하고 만다. 이렇게 두 자매는 하루를 차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비행기 사고로 일가족이 사망하다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독일의 수많은 공국들이 공화국이 되었다. 헤센-다름슈타트 공국도 헤센 국민국가(Volksstaat Hessen)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공국과 왕국 등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기, 왕이나 대공들이 추방이나 처형당했던 것과는 달리,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정치와 군사에서 손을 떼며, 평화로이 퇴임하게 된다. 이후 에른스트는 자신이 좋아한 예술과 과학기술의 후원자로 남았고, 다름슈타트 시민들의 에른스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헤센-다름슈타트대공국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1937년 10월 6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다름슈타트 시민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 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다음 달에 벌어지는 에른스트 가족의 끔찍한 참사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었으며, 그 참사를 경험하지 않게 된 것이 차라리 에른스트에게는 신의 가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으로 10월에 영국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었던 둘째아들 루드비히의 결혼식은 11월로 연기되었다. 이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남은 가족들은 영국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인 1937년 11월 16일 아침 헤센 대공가 사람들은 루드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엘레오노레 대공비와 큰아들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세실 그리고 둘의 자녀인 루드비히와 알렉산더가 갔다. 막내였던 요한나는 너무 어렸기에 집에 남겨졌다.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그의 가족 묘들, 맨 왼족이 에른스트의 묘이며, 그의 오른족 다섯 묘가 비행기 사고를 당한 다섯 가족(부인 엘레오노레 대공비와 큰 아들인 게오르그 도나투스, 며느리인 그리스의 세실, 두 손주)이다.

독일에서 출발해서 북해근처까지 갈때는 비행이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벨기에 Ostend 공항 근처에서 추락하고 만다. 비행기는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나 오스텐트 공항에 착륙을 시도한다. 결국 비행기는 근처 공장의 굴뚝에 날개가 충돌했고, 이후 엔진이 떨어져나가면서 추락했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에른스의 막내동생 마리가 디프테리아로 죽은 지 59주년 되는 날이었다.
결혼식 전날 가족을 모두 잃은 루드비히는 다음날 서둘러 결혼한 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벨기에로 갔다. 이날 마거릿은 신부의 흰색 웨딩드레스 대신 상복을 입고 결혼했다. 그리고 둘의 신혼여행은 가족들의 관을 가지고 다름슈타트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다름슈타트는 큰 충격에 빠졌다. 대공의 장례식이 끝난지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대공가족의 관 다섯 개가 다시 거리를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이제 가문을 계승하게 된 루드비히는 고아가 되어버린 형 게오르그 도나투스의 딸 요한나를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하지만 요한나 역시 에른스트가의 비극을 피하지 못하였다. 비행기 사고로 부모가 죽은 지 2년도 채 안된 1939년 6월 24일 요한나 마저도 병으로 사망했다.

이렇듯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일반인들은 평생 한 번도 겪기 힘든 비극을 끊임없이 마주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슈타트를 독일의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켜낸 그의 삶을 조망해보면 에른스트는 가히 초인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에른스트 루드비히의 시대는 우리나라 고종의 시대와 많이 겹친다. 그러기에
에른스트 루드비히 대공의 묘지를 마주하고 “시대가 인물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인물이 시대를 만들어 가는가?”라는 역사학의 난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1206호 20면, 2021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