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 (1)

지난 해 6월부터 시작된 연재 “이달의 전시”는 코로나 19로 인한 미술관과 박물관 폐쇄가 해제되는 시기까지 잠정 중단합니다.
교포신문사는 “이달의 전시” 연재와 연관하여, 미술관 관람이 허용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초기 미술: 그리스 로마 시대의 회화

유럽미술의 시작은 그리스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크레타섬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대륙이 아닌 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을 만들어냈다.
‘회화’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다. 하지만 오직 극소수의 유물만이 남아있는 관계로 그리스 회화의 발전도는 화가와 관련된 일화들로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누가 더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지 내기를 걸었던 두 화가 제우시우스(Zeuxis)와 파라시우스(Parrhasius)의 이야기는 당시 화가들이 지녔던 열정과 기술력을 가늠하게 한다.
고대 그리스 회화의 한 단면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살펴볼 수가 있다. 당시에는 물항아리(히드리아), 기름항아리(레키토스), 와인 항아리(크라테르), 그리고 다용토 컵(앰포라) 등 다양한 종류의 도기가 발달했는데, 그 위에는 주로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가 그려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술적인 위대함은 끊임없이 유럽에 영향을 주었고,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에게까지도 미쳤다. 로마인들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예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지중해문화의 중심이었던 그리스의 영향으로 로마는 그리스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이상주의에 빠져들었고 그것에 열광했다.
그러나 로마시대 회화 역시 그리스 시대의 회화 작품처럼 현재 전해지는 것이 매우 드믈다.
그러나 다행이도 폼페이 유적의 발굴로 로마시대 회화가 세상에 들어나게 된다.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4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잠긴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발굴을 통해 로마회화의 진면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폼페이의 회화는 주로 대형주택의 벽화로 많이 발굴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 또는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스 회화들이 대부분 유실된 반면 로마회화는 폼페이 등의 매몰로 오히려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중세시대 회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미술은 기독교미술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회화는 당시 높은 문맹률로 인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던 일반인들에게 종교를 전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 인정받아 초기 성당을 장식하는 주된 요소가 되었다.
흔히 중세를 神(신) 중심의 인간관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자연현상을 신의 섭리나 메시지로 해석하고 평가했던 시기인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술은 미술작품이라는 그 자체의 목적을 갖기보다 신의 메시지나 기독교의 교리 전달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됐다.
교리서 속의 삽화나 교회 건축 및 그 안에 장식된 조각과 회화가 또 다른 하나의 복음서 역할을 했으며, 영원하고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한한 인간이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중세미술을 유지시켜 온 하나의 근간이었다.
또한 미술이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람들의 감성에 다가가는 형태를 취하게 됐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억제하고 정신적인 것만 강조했던 초기 종교미술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변화를 보인다. 사람들은 실제로 우리의 삶이 정신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악마적인 것 세속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 악마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싸우고 극복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구원의 심판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앙했다.
이때부터 교회는 천상의 도시를 상징하게 됐고, 사람들은 그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미술작품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사실적 묘사가 뒤따랐다. 사람들은 미술을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만을 나타내려 했던 시도에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보다 설득력 있고 화려한 묘사의 형태로 나타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어떻게 하면 감각적인 세계를 잘 나타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매달렸다. 이처럼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미술은 또다시 사실적인 묘사의 길로 향하게 됐고,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미술작품의 감각적 형태들을 피하고 정신적인 의미만을 강조했던 초기 종교미술로부터 벗어났다.

르네상스로 이끈 천재 화가 지오토

약 1000년 가까이 중세시대의 미술을 장악했던 보수주의적 미술이 한 천재의 등장으로 변화하게 된다. 1267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난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는 중세에 그려졌던 단순한 도구로서의 그림이 아닌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단면적인 표현이었던 그림에 입체감을 넣어 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토의 등장과 함께 회화의 개념 전체가 바뀌게 되는데, 그는 더 이상 미술을 기록하는 수법으로 쓰지 않고 성경의 이야기가 내 눈앞에서 전개되는 듯 한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1206g호 28면, 2021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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