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16)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 뢰머(Römer)광장에서 1

각 도시의 역사산책은 일반적으로 도보로 3-4시간 걸으며 유적과 그 시대 일반인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비교적 걷는 거리가 많게 되는데, 프랑크푸르트만은 예외적으로 걷는 길이가 비교적 짧다. 뢰머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500m 내에 중요 역사적 유적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이지역이 뢰머광장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구시청사인 뢰머(Römer) 건물과 맞은편 약간의 구릉지가 Römerberg이기에 자연스레 광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Römer가 고대 로마와 연관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점이다.

구시청사 Römer는 고대 로마시대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1200년대 지어진 중세시대의 건물이다. 프랑크푸르트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과 박람회를 통해 교역 중심지로 부상되고, 이에 유럽 각지의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이곳에 지어지게 되고, Römer 역시 이러한 상인의 저택이었다.

이제 뢰머광장으로 들어가며 프랑크푸르크 역사산책을 시작한다.

정의의 여신상(Justitia)과 분수

뢰머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광장 중앙부에 위치한 정의의 여신상(Justitia)과 분수이다. 이곳 분수는 여신상의 이름과 함께 정의의 분수( Justitiabrunnen 또는 Gerechtigkeitsbrunnen)로 불린다. 독일에서 Brunenen이 일반적으로 우물이나, 수도 형태의 공동 취수장을 뜻하고 있는데, 이곳 Justitiabrunnen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Springbrunnen)이다.

원래 이곳에는 이전부터 공동취수 형태의 Brunnen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오늘날의 분수형태로는 1611년 지어졌다. 보통 때는 식수 취사용이었으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 행사에서는 황제와 참가자들을 위해 분수대에서 와인이 솟아오르는 이벤트를 벌이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분수대는 1887년 애초 형태를 충실하게 재현한 분수대로서, 와인 상인이었던 Gustav D. Manskopf의 후원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분수대 가운데 당당히 서있는 여성의 동상에 더욱 눈길이 간다.

편견을 배제한 평등을 상징하는 저울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정의집행의 엄격함을 뜻하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이다.

정의의 여신의 눈은 시청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공무원이 공무를 집행함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과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신상의 4면에는 각기 다른 조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정의, 절제, 희망, 사랑의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의 여신상의 공평무사를 의미하도록 눈을 눈가리개로 가리고 있는데, 이곳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가 없이 프랑크푸르트 시청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정의의 분수와 함께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은 애초 석재로 설치되었으나, 1887년 재건 시 현재와 같이 청동상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 정의의 여신상이 뜻밖의 수난을 겪은 적이 있다.

독일 월드컵이 열린 2006년 6월 10일 정의의 여신상 오른 손에 들려있던 칼이 분실되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정의의 여신은 어깨에 잉글랜드 국기를 숄처럼 걸치고 있으면서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한국 대(對) 토고전이 벌어진 6월 13일 오후 7시쯤. 정의의 여신이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태극기의 깃대를 들었다. 누군가 한국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태극기를 유스티티아의 오른손에 쥐어준 것이다. 태극기를 든 정의의 여신상을 중심으로 13일 밤늦게까지 ‘오! 필승 코리아’의 응원구호가 뢰머광장에 끊이질 않았다. 적어도 3~4시간 동안, 정의의 여신은 ‘태극(太極)의 여신’이었다.

뢰머(Römer)

프랑크푸르트 시청은 원래 1288년 5월 25일자 돔 부근에 세워졌다고 사료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호에서도 살펴본바 와 같아 1356년 신성로마제국황제 칼 4세(Karl IV)의 금인칙서(Goldene Bulle) 공포로 프랑크푸르트는 신성로마황제의 선출지이자 대관식이 열리는 도시로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는 보다 큰 시청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1405년 프랑크푸르트 참의회가 뢰머광장 앞의 3개의 귀족 저택을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였다. 그 중 가운데 있는 저택 ‘Römer’의 이름을 따서 이후 시청을 ‘뢰머’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정기시와 박람회 등으로 경제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유럽 각지의 상인들이 진출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그들의 출신지역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예들로는 뢰머, 밀라노, 라테란 등이 있다. 오늘날 뢰머 광장은 이러한 역사에서 유래하였다. 2차 대전 때 크게 파괴되었던 뢰머는 1952년 재건되었다.

뢰머의 2층에 있는 황제홀(Kaiser Saal)은 돔에서 선출되고, 대관식을 마친 신성로마황제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연을 베풀었던 장소였으며, 이 황제홀에는 샤를마뉴(카알 대제) 이후 유럽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52명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1974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 팀이 월드컵을 재패하였을 때, 전 국민 앞에서 축하의 연회를 개최한 곳이 바로 이곳 뢰머 2층 황제 홀 테라스였다. 당시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맥주잔을 높이 들었을 때 독일 국민들은 20세기에 또다시 뢰머에서 “황제 프란츠”를 경험할 수 있었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프란츠 2세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황제의 도시 프랑크푸르트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이렇듯 정치적 중심지로서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적 기억과 함께 현재 속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한편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우승, 다시 한 번 프랑크푸르트 황제홀 테라스에서 우승컵을 높이 들며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현재는 시청의 한 분야인 결혼관공서(Standesamt)가 자리 잡고 있어 뢰머 앞에서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뢰머 황제홀 테라스의 네 황제

뢰머건물을 외부에서 바라보면 2층의 황제홀 테라스를 중심으로 4개의 석조상이 조각되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단순한 건물 장식으로 보기에는 조각상 밑에 새겨진 이름과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이들은 바로 프랑크푸르트 시 역사에 큰 의미를 띤 신성로마 황제들이다.

왼쪽부터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Barbarossa) 루드비히 1세((Ludwig der Bayer), 칼 4세(Karl IV),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이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52년 3월 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출된 최초의 신성로마황제이다. 그는 “붉은 수염 바바로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독일의 왕으로 선출된 뒤, 1155년 교황 아드리안 4세(Adrian IV)에 의해 신성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루드비히 1세는 프랑크푸르트가 유럽 상업의 중심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프랑크푸르트가 사순절 기간 동안 두 번째 정기시를 열 수 있는 권리를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1337년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프랑크푸르트의 정기시를 제국의 공식적인 정기시로 지정하였고, 다른 경쟁도시가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적 중요성을 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도시들이 정기시를 개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기까지 하였다. 이로서 루드비히 1세는 프랑크푸르트가 이후의 역사에서 교역과 무역박람회의 도시로 위상을 굳힐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칼 4세는 지난 호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금인칙서를 통해 프랑크푸르트를 황제선출 장소임을 공식적으로 지정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크푸르트는 신성로마제국에 있어 심장부와 같은 도시임이 확인되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 도시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칼 4세의 금인칙선 공포이후 신성로마제국황제 선출은 프랑크푸르트의 돔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금인칙서 공포 후 2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56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게 되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최초의 황제가 바로 맨 오른쪽 조각상인 막시밀리안 2세(Maximillian II)였다. 그때부터 대부분의 황제는 이러한 관례를 따라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의 선출과 대관 의식을 동시에 거행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출된 33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운데 이 들 4황제의 조각상이 황제홀 테라스에 설치된 것이다.

이들 네 황제 외에도 프랑크푸르트 시에 큰 역할을 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도 기억해야만 한다.

유럽 각국의 상인들이 모여드는 정기시로서의 프랑크푸르트의 중요성은 1240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외국 상인들에게 발행했던 보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보호장은 교역을 위해 이탈리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푸르트까지 여행하는 상인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미 13세기 중반 경에 황제가 외국의 상인에게 보호장을 발행할 정도로 프랑크푸르트가 제국에서 차지하였던 경제적 위상은 성장하여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다음 호에서도 뢰머광장을 살펴보도록 한다.

1209호 20면, 2021년 3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