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42)
20세기의 지휘자(2)

문화사업단에서는 ‘20세기의 지휘자’를 주제로 8명의 지휘자를 선정하여 그들의 생에와 음악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

오페라,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음악애호가들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명지휘자 이름이 있다. 바로 헝가리 출신의 영국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이다. 카라얀의 장기집권이 이뤄지던 20세기 중후반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보기 드물게 카라얀, 번스타인 등과 함께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헝가리출신 지휘자로 영국 황실에서 기사의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인물,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강렬한 비트로 이른바 근육질의 지휘자라고도 불렸던 게오르그 솔티.

1912년 10월 21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리스트 음악원에서 바르토크, 코다이 등에게 피아노 지휘·작곡을 배운 그는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로 본격적인 음악인의 삶을 시작했다.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도 일한 그는 1938년 부다페스트에서 ‘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한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한편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재능을 나타낸 바 있다. 1942년 제네바 국제 콩쿨에 참가해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그는 스위스로 망명해 지휘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취리히에 거주하며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계 지휘자들이 대거 축출된 기회를 맞아 지휘자로도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다. 34세이던 1946년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1952년 프랑크푸르트 시립오페라극장, 1961년 런던 코벤트가든 오페라극장(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의 음악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데카와 계약해 50년간 관계를 유지했던 솔티.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세계 최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 프로젝트였다. 빈 필을 기용, 1958년에 착수해 65년에 완성한 이 전집은 솔티가 카라얀에 버금가는 레코딩의 황제로 비약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1961년에 그는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이곳의 음악수준을 대폭 향상 시킨 공로로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경’이란 칭호를 부여받기도 했다.

1969년부터 시카고 교향악단(Chicago Sym. Orch.)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에 취임한 게오르그 솔티는 야심만만한 패기로 밀어부치면서 선배 지휘자 프릿츠 라이너의 숨결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솔티 자신에 있어서도 CSO의 상임지휘자라는 자리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때까지 솔티는 세계 각국의 오페라 극장을 전전하면서 오페라 지휘에 열을 쏟았으나 CSO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콘서트 전문 지휘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솔티가 CSO와 함께 맨 먼저 시도한 것은 말러의 교향곡 전곡 녹음이라는 대작업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말러의 음악은 일반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솔티는 혼신의 정력으로 말러를 연주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서 세계적인 말러 선풍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말러-솔티-시카고’라는 새로운 도식을 만들어 내면서 세계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녹음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솔티가 이룩한 레코드 1백년사의 금자탑이자 CSO의 주가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그가 함께 솔티는 또 한사람의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수석 객원지휘자로 영입하여 수많은 음악적 쾌거를 이룩해 나갔다. 솔티는 영국의 데카 레코드사에, 줄리니는 독일의 DG 레코드사에 빛나는 명연들을 녹음하면서 CSO를 가히 세계 최고의 연주집단으로 키워 놓은 것이다.

마지막까지 지휘대를 지켰던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잇달은 죽음으로 자극을 받은 듯, 솔티는 1991년 은퇴를 선언했고, 시카고 심포니 측은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했다. 20세기 ‘마지막 황제’로 남은 그는 1992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이끌며 거장 지휘자 부재시대의 공복감을 채워주었다.

20세기 ‘마지막 황제’로 남은 그는 1992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이끌며 거장 지휘자 부재시대의 공복감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마지막까지 레코딩과 지휘대를 오가다 세상을 떠났다.

솔티의 음반으로는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데카)과 말러 교향곡 8번(데카) 등이 유명하다. 관현악곡으로 베토벤(70년대와 80년대, 두 번 녹음했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데카)도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솔티의 생애 첫 녹음은 바이올리니스트 쿠렌캄프(Kulenkampff)와 앙상블을 이룬 피아니스트로 브람스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다(1947년). 지휘자로서의 첫 녹음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인데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Zurich Tonhalle Orchestra)를 지휘했다. 이후 그는 250종의 음반을 발표했고, 그 가운데는 45곡의 오페라 전곡 녹음이 포함되어 있다.

32번이나 그레미상을 받았고, 옥스퍼드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명예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기록은 카라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솔티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1년 뒤,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솔티의 인생과 예술을 기리는 특별연주회가 열렸다.

1211호 23면, 2021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