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19)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돔(Dom)으로 가는 길: Die neue Altstsdt와 Kaiser Dom

이제 뢰머광장에서 신성로마황제의 선출과 대관식이 열린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난 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Alte Nikolaikirche 옆 Swarzer Stern 건물에서 돔 사이의 구시가지 동-서를 연결해 주는 길을 따라 돔으로 가게 된다. 이 길의 공식 명칭은 Markt이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대관식의 길(Krönungsweg)로도 불린다. 신성로마황제의 선출과 대관식이 열린 프랑크푸르트 대성당과 대관식 연회가 열리는 뢰머건물 사이의 길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길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독일인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저력을 확인하게 되는데, 바로 “새로운 구시가지(Die neue Altstsdt)”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 전후 제대로 복원하지 못해, 흉물스러운 콘크리트골조 건물로 가득했던 이 지역을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힘으로 전쟁이 끝난 70여년만인 2018년에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놀라움을 넘어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자, 부단한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구시가지(Die neue Altstsdt) 현장에서 그 재건과정을 살펴보며, 70여년 뒤에 드디어 현재화 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한 모습을 직접 살펴보도록 한다.

새로운 구시가지(Die neue Altstsdt)

남북으로는 북쪽의 Braubachstrasse와 남쪽의 Schirn Kunsthalle 사이, 동서로는 서쪽의 Römerberg(뢰머광장)와 동쪽의 Domplatz 사이에 약 7,000m2의 이 지역은 “대관식의 길(Krönungsweg)”이자, 유서깊은 오래된 시장이 형성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중심의 한 지역이었다. 또한 1944년 공습으로 파괴 될 때까지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 건물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으로,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의 약 1250 개에 달하는 Fachwerkhaus 주택 가운데 상당수가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로 변한 이 지역은 전후 원래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1950년대식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1960년대에는 후반부터는 중앙역과 Konstablerwache를 연결하는 U-Bahn이 건설되고, 1970/71년에는 이곳에 Dom / Römer U-Bahn역이 건설되면서, 이전의 화려했던 구시가지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1972-1974년 프랑크푸르트의 행정과 기술을 담당하는 Technische Rathaus까지 건설되면서, 전후세대들은 이곳의 옛 명성을 단지 부모 세대들의 추억으로만 전해 듣게 되고 말았다.

그렇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래 거주한 동포분들에게는 2018년 새로이 복원된 “Neue Altstadt”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닐 수가 없었다.

2012년부터 2018년까지 Dom-Römer-Projekt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구시가지 재건”으로 Alter Markt, Hühnermarkt, Hinter dem Lämmchen 및 Neugasse의 광장과 거리는 시장의 Rebstock 농장과 Goldenen Lämmchen을 포함하여 역사적인 장소와 저택 내부정원이 대부분 복원되었다

“Neue Altstadt”에는 총 35 개의 건물이 지어졌는데, 이 가운데 15개 건물들은 원형에 거의 가깝게 충실하게 복원되었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전하기 위해 이 건축물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건축 조항들이 적용되었다. 그 예로서는 지상 층의 높이가 건물에서 가장 높아야 하고, 각 창문들은 높이가 너비보다 길어야 하고, 가파른 경사 지붕만 허용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전형적인 특정 건축 자재만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 등이었다.

먼저 새로운 구시가지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Hühnermarkt에 세워진 Friedrich Stoltze 흉상과 분수대(Stoltze-Brunnen)가 가장 먼저 눈에 띤다.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의 도시로 알려진 프랑크푸르트에서 “우리는 괴테의 작품은 잘 몰라도 Stoltze의 시는 적어도 몇 개는 암송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Stoltze는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1978년 Stoltze 문학상(Friedrich-Stoltze-Preis)을 제정하여 프랑크푸르트출신의 작가들에게 시상할 정도이다.

Stolze가 이렇게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작품 중 많은 시들이 프랑크푸르트 지역 방언(Frankfurterisch)으로 쓰였으며, 프랑크푸르트 일상을 소박하게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Stolze가 1880년 발표된 “Fraknkfurt” 시의 초입부분이다.

Es is kaa Stadt uff der weite Welt,
die so merr wie mei Frankfort gefällt,
un es will merr net in mein Kopp enei
wie kann nor e Mensch net von
Frankfort sei! ……

Stolze 분수대에서 돔으로 조금 걸어가면 오른 편으로 Haus zur Goldenen Waage가 나온다. 1619년 르네상스 양식의 아치와 Fachwerkhaus 건축으로 지어진 Goldene Waage는 네덜란드 상인인 Abraham van Hamel이 구 가옥을 인수하여 새롭게 지운 건물이다. Hamel은 우리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선원 하멜이 1653년부터 1666년까지 13년간 당시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인물이다. 우연스럽게 이름이 같겠지만, 우리에게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Haus zur Goldenen Waage는 ‘새로운 구시가지’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복원 건물로 간주되고 있다.

Haus zur Goldenen Waage

Goldene Waage 옆에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시민들에게 세미나나, 행사장을 대여해 주는 현대식 건물 Stadthaus가 있다. 그 건축양식이나, 내부구조로 보아 이 ‘새로운 구시가지’와는 큰 연관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건물보다는 건물 지하의 자리 잡고 있는 고대 유적지가 이 Stadthaus의 진수이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고대 로마유적과 카롤링거 왕조의 유적이 이 지역에서 발굴되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구시가지’ 조성에도 큰 난관으로 다가왔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과 협의, 시민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유적지는 유리지붕으로 지하에 보존하여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해결책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Stadthaus인 것이다.

이 ‘새로운 구시가지’는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70여년이 지난 후에도 복원해야 할 만큼 매우 중요한 역사 유적지이다. 따라서 각 거리와, 건물 하나하나에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에, 독자들께서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의미를 감상하기를 당부 드린다.

2018년 5월 9일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새로운 구시가지’ 2018년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공식 개막축제를 개최하였는데, 이 축제에는 25만-30만 명으로 추산되는 관람객이 방문하며 잊혔던 구시가지의 화려한 복원을 축하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Kaiser Dom): 천년 제국의 도시의 상징

프랑크푸르트대성당(Kaiserdom St. Bartholomäus)은 종교적으로보다는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정치적, 역사적 역할로 유명해진 대성당이다.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을 정치적, 역사적 역할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성당”으로 변역되는 “돔(Dom)”은 그 건축 양식에 따른 명칭이 아니라는 점이다. 돔은 주교가 집전하는 주교좌 성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와 인근 지역에서는 “Kathedrale”로 불린다. 따라서 그 규모가 작더라도 주교좌 성당이라면 돔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주교가 집전하지 않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은 어떻게 돔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성로마황제의 선출과 대관식이 열린 중세시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장소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황제의 칭호가 함께 한 “Kaiser Dom”의 명칭에서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의 당시의 큰 위상을 실감할 수가 있다.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은 680년경 카롤링거 왕조의 교회로 건축된 이래 5번의 증, 개축을 거쳤다. 이러한 증개축의 현장은 성당 입구 안내도에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의 건축역사를 잘 살펴볼 수가 있으며, 현재 건물가운데 남겨진 각 시대의 건축부분도 확인할 수가 있다. 한편 1239년 당시 교황이 예수의 12제자 둥 한 사도인 Bartholomäus 성인의 머리(해골)를 성물로 보내면서 “Bartholomäus 성인에게 봉헌된 교회 (Kaiserdom St. Bartholomäus): 이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역사산책”의 시작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356년 신성로마제국황제 칼 4세(Karl IV)는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공포한다. 이를 통해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은 공식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선출 장소로 지정되었다.

금인칙서에 따르면, 신성로마황제가 사망하게 되면 마인츠 대주교가 4주 이내에 자신을 포함해서 3명의 대주교(트리어, 쾰른, 마인츠)와 보헤미아 왕, 팔츠백작, 작센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 등 4명의 세속 선제후, 7명으로 구성된 “황제 선출위원회”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으로 소집해야만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후부터 신성로마황제 선출은 프랑크푸르트의 돔에서 이루어졌으며, 총 52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운데 33명의 황제가 프랑크푸르트대성당에서 선출되었다. 황제의 대관식은 금인칙서 공포 후 2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562년 막시밀리안 2세(Maximillian II)부터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황제들이 프랑크푸르트대성당에서 황제의 선출과 대관 의식을 동시에 거행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시실은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들어가면 입구 벽면에 당시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황제 선출권을 소유한 제후, Kurfürst)들의 문장(紋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제후는 애초 7명의 제후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로 편입 등으로 최대 10명의 선제후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는 7개가 아니라 10여개의 제후국들의 문장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내부에는 1400년대에 제작된 중앙 대제단, 1509년에 재작된 Hans Buckhoffen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조각, 1627년에 제작된 .Anton van Dyck의 “ 상처입은 그리스도” 등 다수의 예술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8세기 귀족 소녀의 무덤이 1992년 2월 대성당 부지에서 발굴되었고,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매장지 위에 묘비를 세워두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의 전망대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서, 324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95m 높이의 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마인 강과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을 나와 근대독일의 탄생지 Paulkirche로 발길을 옮긴다.

1212호 20면, 2021년 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