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20)
지동설을 주장한 세 과학자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며 전세계 카톨릭의 수도인 바티칸이 있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성 베드로 성당과 그 일대, 궁전 및 주변의 건물들,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대로 교황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며 지금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로마 교황은 직속 영토(교황령)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교황령의 기원은 서기 752년 프랑크왕국의 피핀이 교황에게 땅을 준 것에서 기원한다. 물론 교황은 피핀에게 댓가로 서로마황제의 칭호를 주었다. 14세기 한창 때에는 현재 이탈리아 영토의 15% 정도가 교황의 직속령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면서 교황이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땅은 통일된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영토만이 교황령으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의 바티칸은 1929년 무솔리니에 의해 독립국으로 인정받아 별도의 주권국가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비록 인구(1천여명)나 면적(0.44㎢)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바티칸 시국은 전세계 카톨릭의 총 본산으로서 그 영향력은 어느 나라에 못지 않다. 지금도 바티칸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 신도에게 뿐만 세속적인 분야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성 베드로성당)이 있으며 가장 많은 보물을 보유한 박물관(바티칸 박물관)이 있다.

화형에 처해진 브루노

바티칸을 방문하면서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가 교황청과 지동설, 교황청과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에서는 옛날부터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있으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어 왔다. 그리고 태양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지지하여 왔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과학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계관(지동설)은 로마 교황청과 충돌하게 되는데 로마 교황청은 당시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던 과학자들(브루노, 갈릴레이)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처벌하였다.

1600년 2월, 로마의 광장에서는 이탈리아의 과학자이며 성직자인 브르노의 화형식이 있었다. 그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종교재판에 의하여 결국 불에 타 죽게 된 것이었다. 그의 몸이 뜨거운 장작더미에 불탔지만 그는 끝까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의 사상이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즉 우주에는 무한히 많은 별들이 있으며, 또한 우주는 끝도 중심도 없이 오직 운동을 계속할 뿐이라는 것이다. 브르노에게 있어 신은 곧 우주와 자연이었다. 그리고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갈릴레이

지동설을 주장한 또 다른 천문학자인 갈릴레이는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망원경을 발명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였으며 1632년에는『두 개의 주요한 우주체계의 대화』라는 책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 이 책은 판매 금지를 당하고 급기야 그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소환을 받게 된다. 갈릴레이는 노환을 핑계로 출두를 미루다가 1633년 2월 로마로 가게 된다. 드디어 1633년 6월, 로마에서는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열렸다. 브르노가 죽은 지 3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재판관들은 갈릴레이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철회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화형에 처한 부르노처럼 용기있는 인물이 되지는 못하였다. 갈릴레이는 결국 자신은 태양중심설을 실제로 믿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판소를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덕분에 갈릴레이는 78세까지 긴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갈릴레이가 죽던 해(1642년) 12월 25일, 영국에서는 인류과학사 최고의 천재인 뉴턴이 태어났다. 결국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한편 갈릴레이 재판으로부터 360년이 지난 1992년, 마침내 로마 교황청은 1633년 갈릴레이에 대한 교황청의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동설을 금지했던 옛날의 조치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폴란드의 겁많은 과학자 코페르니쿠스

브르노와 갈릴레이에 훨씬 앞서 1543년에 이미『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자가 발간되었다. 종전의 지동설을 부정하는 최초의 책자였다. 저자는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1500년간 믿었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 놓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이단적인 발상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거룩하고 완벽한 기존의 체계를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자신의 이론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평생 이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그는 갈릴레이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그의 저서도 그가 죽던 해가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기존의 것을 완전히 뒤엎는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세 사람의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외부로 주장하는데 있어서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 마음속에 있던 생각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록 세 과학자들은 각기 다른 상황으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어떠한 것들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없애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구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들도 우주의 참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212호 22면, 2021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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