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44)
20세기의 지휘자(4)

문화사업단에서는 ‘20세기의 지휘자’를 주제로 8명의 지휘자를 선정하여 그들의 생에와 음악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칼 뵘(Karl Böhm, 1894- 1981)

사실 카라얀 생전에 그와 자주 비견되던 인물은 번스타인이 아니라 뵘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이었고, 베를린 필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빈 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카라얀 독재시대’에 유일하게 카라얀을 대적할 지휘자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1년 타계할 때까지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서양음악 중심 레퍼토리에서 빈 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한 그의 후기 낭만주의적인 해석이 크게 호응을 얻었던 탓도 있다.

1921년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 오페라극장에 지휘자가 되어 정식으로 지휘인생을 시작한 그는 1927년 다름슈타트의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당시 현대음악의 첨병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의 인연으로 그는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의 해석에도 일가견을 인정받았다.

1931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을 상연하며 작곡가와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는 후대에 뵘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최고 해석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34년에 프리츠 부쉬의 후임으로 드레스덴의 작센 국립관현악단(Staatskapelle Dresden)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의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원숙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일화를 하나 꼽자면 그가 드레스덴을 떠나던 마지막 날에 수백명의 인파가 역까지 배웅을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휘자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나치 협력문제와 연관되어 지휘금지를 당했는데, 당시 나치의 협력 여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그러나 전범 재판에서 Furtwängler보다 몇 달 빨리 사면받았다는 사실로 보아 나치와의 연관은 경미했다고 보여진다.

1947년부터 지휘를 재개하는데 1954년 생애 두 번째로 빈 국립오페라극장(Wien Staatsoper)의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고, 1955년 11월 5일 재건된 국립오페라극장 건물에서 역사적인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그러나 극장 안팎에서 갈등으로 인해 1956년 3월 사의를 표했고,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즉각 뵘의 사표를 수리하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후임자로 내정했다.

빈 국립가극장을 사임한 이후에는 더이상 특정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휘하고 싶다’는 본인의 말대로 평생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다. 애초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갈등이 생긴 이유가 뵘의 해외 객원지휘 횟수가 너무 많다는 불만이 극장 경영진뿐만 아니라 빈의 음악애호가들에게도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1957년 10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다. 1960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에도 데뷔하여 두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미국 활동을 이어나갔다.

1962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이후 바이로이트와의 파트너쉽은 70년대초까지 이어졌고 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1964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국가 음악감독(General Music Director of Austria)이라는 명예직에 임명되었다.

여러 곳에서 상임지휘자 제의가 들어왔지만 모두 사양했다. 특히 1970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37년만에 상임지휘자직을 부활하여 뵘에게 제안했다고 하는데 빈 필이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에는 빈 필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 칭호를 수여받았다.

1970년대에는 빈 필 이외에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교류가 눈에 띄었다. 런던 심포니는 기량에 비해 저평가받는 측면이 있었는데, 1973년 런던 심포니를 처음 객원지휘했던 뵘은 악단의 실력이 의외로 훌륭한 것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다. 영화음악 등에 치중하느라 고전음악에 취약하는 인식이 강했던 런던 심포니의 경영진들은 마에스트로 뵘을 포섭하기 위해 적극 노력했는데, 뵘에게 당시 다른 일급지휘자의 세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개런티를 지불했다. 1977년에는 런던 심포니의 명예지휘자가 되었다.

1981년 여름, 뵘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잘츠부르크 교외의 별장에 머물렀지만 8월 5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87회 생일을 2주 앞둔 그 해 8월 14일에 사망하였다.

뵘의 음악세계

뵘의 음악은 처음에는 왠지 거칠고 윤기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나 곡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응집력으로 감상자의 감정을 흔들어 의지와 정열로 가득찬 뵘 스타일의 참맛을 느끼게 만들고 만다. 뵘의 스타일은 정확하고 엄격하면서도 소박했고, 작품전체의 조형에 강박적이라 할 만큼 집착하였으며, 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감상에 빠져버린 허우적거림, 과도하게 부풀려진 스케일, 또는 육중하게 청중을 짓누르는 중압감이나 기름기 따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하고 치장할 줄 모르는 그의 음악적 색깔은 비록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아한 격조가 느껴진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는 작품의 정신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형용의 추구가 아닌 대단히 현실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는 리허설에 임하여 단원들에게 요구하거나 지시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음악적 요구나 지시사항은 놀랄 만큼 실제적이어서 웬만한 논리가 아니면 반발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단원들로부터 진정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뵘은 빈 고전파의 전통을 항상 최고의 선으로 지향하였으며, 그 전통 앞에서 항상 겸허하였으며, 또 그것을 소중히 지켜나감을 생의 지상과제요, 목표로 간주하였다.

뵘의 음악은 ‘니키쉬-뵘 링 (Nikisch-Boehm Ring)’의 계승자인 주빈 메타 (Zubin Mehta)나 칼 뵘 상 (Karl Böhm Preis)의 수상자인 랄프 바이케르트 (Ralf Weickert) 등 뿐 아니라 많은 후대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213호 23면, 2021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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