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21)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마지막 회)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 역사산책을 마치며: 프랑크푸르트와 유대인 이야기

괴테 생가를 마지막으로 프랑크푸르트역사 산책은 종료되었다. 도보로 진행되는 역사산책이기에 전지역을 살펴볼 수 없는 단점은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3-4시간 동안 직접 당시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느끼는 도보 역사산책은 그 나름의 깊은 감흥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도보로 둘러보는 프랑크푸르트 역사산책은 그래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 등의 도시와 여러 분야를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프랑크푸르트이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다지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가 못하다.

프랑크푸르트 역사산책을 마치며, 에필로그로 못 다한 프랑크푸르트 이야기, 그 가운데에서도 프랑크푸르트와 유대인 이야기를 덧붙이며 프랑크푸르트 역사산책을 마치도록 한다.

프랑크푸르트와 유대인

프랑크푸르트에는 현재 7000여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며, 독일에서 2번째로 큰 유대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유대인들은 지난 역사에서 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193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독일에는 약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독일의 유대인 중 약 70퍼센트는 도심지에 거주했다. 전체 유대인 중 50퍼센트는 베를린(약 16만 명),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약 2만 6,000명), 브레슬라우(약 2만명), 함부르크(약 1만 7,000명), 쾰른(약 1만 5,000명), 하노버(약 1만 3,000명), 그리고 라이프치히(약 1만 2,000명) 등과 같은 독일 10대 대도시에 거주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약 1150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사료에 나타나고 있으며, 1241년에는 기독교 세례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해 분노를 표출로 시나고그가 약탈당했으며 180여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1462년부터 1796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근처의 Judengasse 지역에 게토(Ghetto)형식으로 강제로 집단 거주하게 된다. 나치 치하인 1933~1945년 사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유대인 11,915명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2차 대전 종료 직후 1945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피난 등으로 떠났던 유대인 100여 명이 돌아왔고 1950년에는 시나고그를 재건하며 유대인 커뮤니티를 다시 부활시켰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자 유대인들 일부가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고 소련의 유대인 이주 허용 정책으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는 인구는 크게 늘어나 오늘날에는 약 7000명의 유대인이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Rothschild) 금융 가문을 일으키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생계를 위해 금융업체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20세 때 골동품·고(古)화폐 가게를 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은 성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시대마다 성처럼 사용하는 이름이 바뀌었는데, 거주하던 집 대문에 붉은 방패 모양의 문장이 있었기에 로트쉴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 유대인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되자 그 때 사용하던 로트쉴트를 가문의 성으로 사용하였고, 이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영어식 발음인 로스차일드로 불리게 된 것이다.

화폐 수집광이던 헤센의 빌헬름 백작에게 진귀한 화폐를 갖다 바치는 등 공을 들인 끝에 1769년, 그의 가문에 물품을 독점 공급하게 됐다. 몇 년 뒤 백작이 나폴레옹 군대에 쫓겨 피란을 떠나자 목숨을 걸고 그의 재산을 지켜냈다. 백작은 그에게 유럽 각국에서 자신이 받을 돈을 수금할 권리를 줬다. 로스차일드 신화가 시작된 계기였다.

세계적인 금융가문으로 성장한 로스차일드는 다섯 형제를 유럽 각국으로 보내 사업을 확장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본가는 로스차일드가의 장자가 지키게 되는데, 1886년 후계자 칼이, 그리고 1901년 빌헬름이 죽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더 이상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영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청산절차를 밟았다. 만일 이때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30년 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등장했을 때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했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알리는 ‘수정의 밤’ 사건 발발 50주년을 기해 1988년 개관한 프랑크푸르트 유대인박물관은 로스차일드 가의 저택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안네 프랑크(AnnelieseMarie Frank)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세계에 알린 “안네 프랑크 일기”는 잘 알고 있으나, 주인공 안네 프랑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했다는 점에는 낯설기만 하다.

안네 프랑크는 1929년 6월 12일 프랑크푸르트 Marbachweg 307번지에서 태어났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이어 프랑크푸르트의 지방 선거에서도 나치가 다수당이 되자, 반유대주의 정책은 표면화 되었고, 안네 프랑크 가족은 잠시 아헨으로 이주했다가 1934년 독일을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한 후인 1942부터 안네 프랑크가족은 암스테르담에서 숨어지내다 1944년 발각, 가족들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베르겐 벨젠(Bergen-Belsen)으로 떠나게 되었고, 안네 프랑크는 1945년 3월 12일 15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영국 군대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기 한 달 전이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안네 프랑크를 기리는 시설들이 다수 있다.

Hansaallee 150번지에 위치한 안네 프랑크 교육소(Bildungsstätte Anne Frank)는 지역 주민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안네 프랑크의 이름으로 청소년 만남의 장소가 생겼으면 하는 입장을 표명했었고 그의 희망은 구체화되었다. 안네 프랑크 교육소는 인권의 존중을 중요 가치로 삼는 정치교육의 장이 되었다.

또한 “안네 프랑크 기억의 장소(Erinnerungsorte zu Anne Frank)”도 있다. 이 기억의 장소는 “안네 프랑크 교육소”와 더불어 그녀가 태어난 Marbachweg 307번지 주택과 이후 아헨으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Ganghoferstraße 24번지에 위치한 주택에는 안네 프랑크를 기리는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흔적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멀지 않은 돈부쉬(Dornbusch) 지역의 “열린 안네 프랑크 책장(Offener Anne Frank Bücherschrank)”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안네 프랑크와 잘 어울리는 기념물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장은 관상용이 아니다. 누구든 원한다면 책장을 열고 무료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다.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스카 쉰들러는 그의 말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냈다.

1944년에 소련군의 진군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쉰들러는 약 1,200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목록을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공장을 세운 다음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리는 식으로 약 1,200명을 구해낸 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모해가며 약 7개월 간 이들을 보호했다.

종전 후 쉰들러는 사업에 실패하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아르헨티나로 이주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57년 독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에 자리 잡는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처했으나, 1965년 독일 공로훈장 수훈, 1967년 마틴 부버 평화상 수상 등 그의 의로운 행동은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그를 ‘의인’으로 기리고 있으며, 그의 유해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묻히게 된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972년에는 예루살렘의 Hebräische Universität는 그의 이름을 딴 강의실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1957년부터 그가 사망한 1974년까지 거주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앞 Am Hauptbahnhof 4번지에 1996년 기념판을 설치하였으며, Bonames 지역에 Oskar-Oskar-Schindler-Straße 가로 명을 지정하였다.


서독의 수도 결정에서 프랑크푸르트 시의 불운 

서독 정부의 수립과 함께 베를린을 대치할 새로운 수도(首都) 결정이 서독 국민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새로운 수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통일까지의 임시 수도)의 후보지로 4-5 도시가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본과 프랑크푸르트 두 도시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당시 일반인들과 정계에서는 본보다는 프랑크푸르트를 유력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는 국제공항의 존재와, 중세시대 수백 년에 걸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린 도시이며, 1948년에는 국민의회를 개최, 전 독일지역에서 대의원이 참가해 독일 국기, 독일의 헌법,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소독일중의)의 결정 등 근대 독일을 출범시킨 도시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이에 반해 본은 베토벤의 생가 정도가 내세울 수 있는 전부였다.
수도 결정을 위한 의회 투표결과를 낙관한 프랑크푸르트 시 발터 콜브(Walter Kolb)시장은 발표전 이미 방송과 환영 연설 녹음을 끝내놓았고, 독일 의사당을 현재 헤센방송국 자리에 들어설 것이라 발표할 정도로 프랑크푸르트의 승리는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1949년 5월 10일 의회에서의 투표결과 예상과는 달리 33표를 얻은 본이 29표를 얻은 프랑크푸르트를 누르고 서독의 수도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의 정치적 막후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쾰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아데나워는 당시 수도 선정문제가 기민련(CDU 본 지지)과 사민당(SPD 프랑크푸르트 지지)과의 경쟁으로 유도, 애초 프랑크푸르트가 위치한 헤센주 기민당 의원 6명을 프랑크푸르트 지지에서 본 지지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 선정을 위한 1949년 9월 3일 재투표에서도 프랑크푸르트는176표를 얻어 200표를 얻은 본이 최종적으로 서독의 수도로 결정되었다.

1216호 20면, 2021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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