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 (11)

20세기의 회화

이전 연재에서 살펴본 것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은 이전의 관습화된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데 집중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되자, 이러한 새로움을 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피카소, 뒤샹 등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서 계속 확대, 발전되었고, 그 결과 유럽 현대 회화(모더니즘 회화)의 전성기를 만들게 된다.

특히 후기 인상주의는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표현주의란 인간의 내면의 감정과 감각의 표현과 구성에 주목하는 경향으로. 사실상 후기 인상주의, 추상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등 20세기 전반의 회화 사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번 호부터는 20세기 이후의 회하 사조를 발생시대 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분리파(Secession, 1892~1910)

분리파(Secession)라는 용어는 ‘분리된 서민(secessio plebis)’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사에 따르면, 특권 귀족계급(Partiscius)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로마의 서민계급(Plebis)이 도시 외곽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는데, 이러한 저항의 몸짓이 바로 ‘분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제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분리’의 움직임이 19세기 말 유럽의 젊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독일의 뮌헨 분리파(1892), 베를린 분리파(1898),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1897)를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빈 분리파에 대해 알아보자.

분리파 탄생의 사회적 배경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 빈(Wien)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인구 200만에 육박하는 국제도시이자, 전기·철도·자동차 등 현대 사회로서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카페와 살롱에서는 철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전위 문학가들의 지적인 대화가 오갔고 활기가 넘쳤다.

이 시기 빈에서는 여러 학문과 예술에서 20세기를 주도할 위대한 선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소설가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쇤베르크,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리고 코코슈카 등이 빈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미술분야에서는 화가들은 보편적 미를 추구하는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고 과거의 모든 예술 양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했다. 예술 아카데미의 족쇄를 벗어 던진 빈의 일군의 화가들은 “창작에 있어 불편한 감정들은 숨겨야 하는 것인가. 예술은 이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분리파’의 출발을 알렸다.

분리파의 탄생

1897년 4월, 당시 35세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빈 미술가연맹에 서한을 보내고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1868~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를 포함한 19명의 젊은 미술가와 함께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Vereinigung bildender Kunstler Osterreichs)’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했다.

조직의 초대회장을 맡은 클림트는 서한을 통해 “해외 미술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순수한 목적의 미술전시 구성, 그리고 공공단체들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 촉구”로 요약되는 선언문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존 단체와의 ‘분리’를 표명했다.

우선 진보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폐쇄적인 빈 미술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술의 국제적인 교류를 시도했다. 당시 빈 사람들은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미술과 같은 외국의 앞선 작품들을 접해본 적이 없었고 마네, 고갱, 쇠라, 반 고흐 역시 낯선 이름이었다. 빈 분리파는 새로운 미술을 지지하는 외국작가들의 작품을 들여오고 자신들의 작품 또한 적극적으로 외국에 소개하고자 했다.

빈 분리파의 구상은 그들의 첫 번째 전시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898년 1월에 잡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을 창간하고 3월에 개최한 첫 전시회에서는 로댕(August Rodin), 휘슬러(James Abbot Whistler),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크노프(Fernand Khnopf), 클링거 (Max Klinger) 등,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로 알려진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구사하는 미술가들이 대거 소개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빈 분리파의 대표 양식으로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cessionstil)이라 불렸다. 이들의 핵심은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통합하여 미술과 생활의 총체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분리파의 리더는 <키스>, <환희의 송가> 등으로 유명한 클림트)로, 나체에 대한 묘사, 황금색을 아낌없이 사용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부터 대단한 찬사와 격렬한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외에도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의 작가들이 있다.

그러나 1904년 빈 분리파는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클림트 그룹은 응용미술을 강조했고, 그의 후계자 요제프 엥겔하르트(Josef Engelhart)가 이끄는 그룹은 순수미술을 중시했다. 이에 호프만과 올브리히, 클림트를 비롯한 일군의 화가들이 탈퇴하자 분리파의 기세도 점점 기울었다.


지난 해 6월부터 시작된 연재 “이달의 전시”는 코로나 19로 인한 미술관과 박물관 폐쇄가 해제되는 시기까지 잠정 중단합니다.
교포신문사는 “이달의 전시” 연재와 연관하여, 미술관 관람이 허용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1217호 28면, 2021년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