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 (12)

20세기의 회화

이전 연재에서 살펴본 것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은 이전의 관습화된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데 집중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되자, 이러한 새로움을 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피카소, 뒤샹 등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서 계속 확대, 발전되었고, 그 결과 유럽 현대 회화(모더니즘 회화)의 전성기를 만들게 된다.

특히 후기 인상주의는 이후 20세기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표현주의란 인간의 내면의 감정과 감각의 표현과 구성에 주목하는 경향으로. 사실상 후기 인상주의, 추상주의, 상징주의, 입체파 등 20세기 전반의 회화 사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번 호부터는 20세기 이후의 회화 사조를 발생시대 순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독인 표현주의 그룹 ‘다리파’(Brücke)

독일에서 표현주의자(Expressionist)라고 자칭하는 화가들이 미술이란 실제 세계의 영상을 그리기보다는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리파는 독일 최초로 아방가르드 미술을 추구한 화가 그룹으로, 1905년 6월, 공업대학의 건축과 학생인 헤켈,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슈미트 로트라프 등이 창설했다. 다리파는 단어 그대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의 구실을 하리라는 믿음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작업했는데 극도로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를 통해 격력하고 고뇌에 가득 찬 작품을 만들었다.

다리파 회화의 시대적 배경

다리파가 넘고 싶었던 다리는 세기말 독일 화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구세대 미술이었다. 19세기 말 베를린 분리파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대표적이다.

신세대 다리파는 미술의 권력이동을 요청하며 세대 간 경쟁에 도전한다. 1906년 드레스덴의 지역신문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분명히 그 뜻이 보인다. “우리는 진보에 대한 믿음, 신세대 창작자와 감상자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청년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를 짊어질 청년으로서,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낡은 힘들에 대항하여 가난과 삶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1906년에는 폐히슈타인, 일시적이지만 놀데도 이에 참가했고 1910년에는 베를린의 뮐러도 합세했다. 특별히 명확한 강령은 없었지만 인상주의적인 분리파(제체션)에 반대하고, 나아가 사회를 비판한다는 의향 하에 자진해서 노동자 촌에서 생활, 공동적 제작활동에 의해 표현주의 운동의 단서의 구실을 수행했다. 1906년부터 <연간 판화집 브뤼케>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판화와 같은 복제기술을 이용한 생산성 강화로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리파의 판화, 특히 목판화의 이차원적 평면과 백, 흑의 대비 속에서 힘찬 정신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독자적 예술범주로 높인 의의는 크다.

다리파 예술의 특징

그들은 특히 대중사회에서의 개인의 갈등과 고립, 현대인간의 심리적,사 회적 의식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았다. 동시대의 야수파 화가들이 여전히 자연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한 반면, 다리파 화가들은 물질적이고 타락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억압과 비명을 보다 적극적 형태 왜곡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자 했다.

다리그룹은 출발 시 불투명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독일이 독자적 예술을 정립해 나가는데 중대한 이정표로 자리잡고 있으나 해체 후 독자노선, 청기사같은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기에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다.

다리파의 대표 작가 키르히너

다리파 작가 중 가장 대표적으로 뽑히는 작가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이다.

키르히너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같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회화와 판화에 관심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그리고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원시 미술에 매료되어 매우 거칠고 원색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특히 미술을 내적 갈등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시각 표현으로 보고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했다.

그러나 1913년 키르히너와 다른 회원들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브뤼케파가 해체되었다. 키르히너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임시 제대했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무렵인 1933년 즈음,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는 키르히너를 ‘퇴폐 미술가’로 규정했다. 결국 1937년 나치 정권은 뮌헨에서 선전용으로 ‘퇴폐미술전’을 열면서 여기에 키르히너를 포함시켰고, 여기에 더해 나치는 키르히너의 작품의 전시 및 거래를 금지하고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철거, 파괴시켰다.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심한 우울증을 앓다 58세가 되던 193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해 6월부터 시작된 연재 “이달의 전시”는 코로나 19로 인한 미술관과 박물관 폐쇄가 해제되는 시기까지 잠정 중단합니다.
교포신문사는 “이달의 전시” 연재와 연관하여, 미술관 관람이 허용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1218호 28면, 2021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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