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서 잠자는 ‘한국 문화재’ 에 관심을 갖자!

김(Beckers-Kim)영자박사

1. 시작하는 말

요즘 세계 여러 나라들이 외국에 있는 자기 나라 문화재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스, 이집트를 위시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해외에 반출된 자국 문화유산의 소재지를 찾으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반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해외 문화재 소재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불법반출된 문화재의 환수 및 회복을 기하고 있다. 한국에서 현재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 두 곳있다.

첫째, 국립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단>은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세계 박물관에서 근근히 존재를 유지하는 우리 유물들을 찾아내어 전문적으로 정리, 목록도록을 작성해주기도 한다. 더욱 뜻 깊은 일은 오랜 기간 보존을 제대로 못 해 손상된 유물을 보존처리까지 맡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중에 불법반출이 증명되면 환수한 예도 더러 있다.

두번째 기관은 국회산하에 있는 사립재단인 <한국문화회복재단>이다. 2018년 한국문화회복재단이 창설되었으나 그 전신의 역사는 한참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 이사장 이상근 대표는 젊어서부터 한국문화재 환수를 평생의 과제로 삼아 활동을 하였고 그분의 주위에는 해외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한국인들이 통신망과 정보망을 전세계에 거미줄처럼 긴밀하게 엮어 함께 활동한다. 필자 역시 이 한국문화회복재단 조직의 독일지부 고문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2. 문화재 보존에 관한 각성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필자는 운좋게 한국문화유산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물론 스스로 한국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도 하다. 학위를 마치고 독일의 한 시립박물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고미술의 가치에 눈뜨게 되었다. 그 결과 경매도록을 많이 살폈다. 주머니가 허락하는 한도에서 한국유물을 구입했다. 이베이(Ebay)에도 자주 들락거리면서 한국에 관한 고서며 문화재도 재수 좋을 때는 구입이 가능했다. 여행을 가면 제일 먼저 찾은 곳이 고서방이나 고미술상이었다.

고종황제 엽서

방학에 한국을 찾은 경우 황학동(평화)시장에 있는 “벼룩시장”과 인사동 장안(한)평고미술가게를 자주 방문했다. 독일의 벼룩시장은 매 주말이면 찾아다녔다. 내 주머니가 허락하는 만큼 민속품들을 사들고 왔고 지금도 집에 잘 간직하고 있다. 집안 곳곳에 제 자리를 잡고 있어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좀 과장된 칭찬으로 ‘여기가 한국박물관이네’ 할 정도이다.

지난 40여년간 한국에 관하여 쓰여진 고서들을 구입했고 몇 년 전에 한국 국립민속박물관을 위시하여 여러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후에도 계속 구입해 모은 고서, 고지도들이 다시 살그머니 집안에 쌓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필자는 독일 주변에서 한국유물을 구하게 되었다. 이제는 열심히 모아 아끼면서 보관했던 유물을 고국으로 보내기로 하고 내 삶의 마지막 정리를 하는 중이다.

근래에 이르러 국가나 국민들이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 발굴에 꽤나 관심이 많다고 자부한다. “주변에 있는 한국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 독지가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우리 문화재 재발견과 보존을 위해서 재독생활 40여년 동안에 필자가 기울인 노력의 일환으로 문화재회복에 큰 성과를 거둔 10년전의 두 가지 “성공담”을 이 지면을 통해 알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더 많은 분들이(주위에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 찾기’에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3. 우리 문화재 회복을 위한 노력의 성과

1)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한국선교관 재개관

획기적 첫 걸음은 남독에 있는 상트 오틸리언 선교수도원의 선교박물관 재개관과 동시에 단독 한국관을 신설이다. 2005년 말, 막 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할 즈음 마치 때를 맞추기나 한 듯 남독일에 있는 한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선교수도원에서 연락을 해왔다. 수도원에 수장된 한국유물을 정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다. 이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에는 1909년에 한국의 선교를 시작하여 1910 경년부터 수집한 한국의 민속품이 진열관에서 100 여년을 ‘거의 잠자고’ 있었다.

이 선교 수도회는 19세기 중엽에 창설되어 첫 선교지로 동아프리카를 택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사들은 선교지 아프리카의 수많은 민속품을 수집했고, 그 당시의 수집품은 선교를 하러 떠나는 수도자들의 사전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19세기 원주민의 생활 사진, 선교사들이 사냥한 야생동물의 박제품, 희귀한 각종 곤충류 채집을 전문적으로 정리한 책 등을 선교박물관에 보존하고 현재까지 아프리카 원주민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09년부터는 동양 최초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노르베르트 베버 총원장이 1911년, 1925년 두 차례 선교 상황을 시찰하러 한국을 방문하였다. 주로 도보나 말을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둘러보았는데 베버 총원장은 한국문화에 매료 되어 선교 여행 중 일제의 말살정책에 사라질 뻔한 한국의 문화유산들을 수집해서 본원 선교박물관 지하층에 보존했다.

오틀리엔 선교박물관 내 한국관

선교관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뒷켠에 한국.중국.일본, 태국 등 동양유물들이 뒤섞여 먼지와 직사광선을 받으면서 100 여년간 초라하게 진열장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내 일이 시작되었다. 일차적으로 동양유물을 나라별로 선별하고 난후 단독 <한국관>을 구상했고 수도원장의 동의를 얻었다.

동시에 한국유물을 전문적으로 조사해줄 국내 기관을 물색했다. 10 여년 거친 피땀 흘리는 노력의 결과로 2015년 10월부터 단독 한국관은 그 화려한 문을 열었다. 지금은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독일은 물론 한국으로부터 많은 방문객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료 봉사한 보람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2012년 “벼룩시장” 같았던 선교박물관 동양전시관의 유물을 해체할 당시, 기억에 새겨진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한 진열장에는 조선의 갑옷 위에 일본 사무라이 투구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이 갑옷이 조선시대의 갑옷인지 단숨에 알 수 없었다. 그 청색면갑옷은 국내에도 희귀한 유물이고, 오래동안 소홀했던 관리로 면천과 철물이 부식된 지 오래여서 더 이상 진열이 불가능했다. 현재 이 갑옷은 한국으로 귀환을 했고, 더 이상 부식이 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복제품을 준비중이다.

한국관에서 가장 손꼽는 곤여전도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다. 원래 곤여전도는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신부 페르디난드 페르비에스트(Ferdinand Verbiest)가 1674년 북경에서 그 초판을 제작 출판 하였다. (중국본토에서 제작한 지도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1860년에 조선 철종시대에 제작된 완본 세계지도 <만국곤여전도>는 국내에도 몇 점 현존하지 않는다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지도참조).

한국에서 제작될 당시는 8폭 병풍으로 제작되었으나 당시 모습은 병풍이 해체된 상태였다. 지금은 보수를 마치고 당당히 한국관의 제 1 보물이 되었지만 ‘곤여전도’ 를 필자가 처음 보았을 때 보존상태는 거의 ‘암 말기’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당시 수도원장은 이 귀중한 유물의 ‘암수술’을 결정했다.

곤여전도에 사용된 배접지를 문화재청에 전달

100여년간 직사광선을 견디다 못해 8폭 병풍이 찌그러지고 내부에서는 벌레들이 한지 지도를 갉아 먹어 지도위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말 비참한 상태였다. 지도를 해체하고 진단을 받으니 엄청난 액수의 보수비가 나왔고 정말 막막했다.

대원장께서는 보수비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하며 한국에서 후원자를 구해보라 하며 학예사인 나만 졸라 댔다. 잠을 설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궁리 끝에 필자의 조카(언니의 딸)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단번에 구원자가 되어 주었다. 곤여전도는 현재 한국관에서 당당하게 한국의 위용을 보여준다.

또한 곤여전도를 해체하면서 발견된 배접지 전라도 익산의 군적지는 2016년 한국문화행사 때 문화재청에 전달했고 왕실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사진:

김박사님 사진

상트 오틀리엔 수도원 한국선교관

2016년 상트 오틀리엔 수도원에서 열린 한국문화행사

사진 3: 고종황제 엽서

사진 4: 헤르만 산더 기증전시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