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

우리 문화유산들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서

2005년 7만 4434점, 2012년 14만 9126점 그리고 2019년 18만 2080점. 해가 거듭될 때마다 무섭게 증가하는 이 숫자는 매년 4월 1일 국외 소재 문화재재단에서 발표하는 ‘국외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 수’이다.

영국박물관, 파리 기메박물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이나 하버드대학교박물관같이 세계 유수의 대학 박물관에서 한국의 문화재를 만날 때면, 타국에서 뜻하지 않게 고향 친구를 마주하는 반가운 마음이 든다.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은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외롭게, 그러나 의연하게 한국을 알리고 빛내고 있는 우리 문화유산들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글이다. 입이 달려 가고 싶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발이 달려 스스로 떠난 것도 아닐 텐데 어쩌다 우리 문화유산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는지 그 발자취를 흥미진진하고 이해하기 쉬운 말들로 전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깊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만, 이 책은 그런 감정들보다도 우리 청소년들이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들에 대해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슨 역할을 해나가야 하는지 그 길을 밝히고 있다.

문화유산은 예술성뿐만 아니라 역사성을 담고 있기에 일반적 물건과 다르다.

1945년 이후 12개국에서 1400여 점 환수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문화재 반환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계한 국립박물관은 1945년 12월에 일본인 소유 문화재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접수한 문화재가 서울박물관이 약 4,500점, 경주박물관이 1,500여 점, 공주박물관 100여 점, 대구박물관 300여 점으로 신라・백제 등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고 오구라, 가루베 등 일본인 수집가들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또한 진단학회는 일제가 약탈한 문화재의 환수를 위해 1945년 12월 환수할 문화재 목록을 미군정청에 제출했다.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가 본격화된 것은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열리면서이다.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총 7차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고, 1966년 약 1,400여 점이 환수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당시 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약 4,400여 점을 반환할 것으로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1,432점(106점은 1958년 반환)함으로 한국 정부가 요구한 수준의 3분의 1만 돌려주었다. 무엇보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국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정당한 소유권의 이전으로 주장하고, 한국 정부의 ‘반환’ 요구에 ‘기증’으로 대응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 정부가 발행한 해설 책자를 보면, 이들의 입장을 확연히 알 수 있다.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환수되어
1967년 국보로 지정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일본]가 소유하고 있는 한국에서 유래하는 문화재는 모두가 정당한 수단에 의하여 입수되어 한국으로 반환할 의무가 없지만, 한국 국민이 그 역사적 문화재에 대하여 갖는 깊은 관심 및 한국동란에 의하여 그 문화재의 다수가 산실되어 버린 사정 등에 비추어 문화 협력의 일환으로써 부속서에 기재된 우리나라 소유의 문화재를 한국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돈’이 급했던 당시 우리 정부의 양보로 ‘3분의 1만 인도’받았던 탓에 일본이 약탈하거나 불법 반출한 문화재의 환수 문제는 역사의 과업으로 남게 되었고, 현재를 사는 이들이 역사의 숙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1,400여 점의 문화재가 돌아왔지만 국보로 지정된 것은 단 2점에 불과하다.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환수되어 196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5년 한일 문화재협상이 미완으로 그치자, 국민들의 자발적인 환수운동이 시작되었다. 1978년 재일사학자 최서면 박사가 야스쿠니신사에 북관대첩비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환수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조선 왕실에서 빌려 간 문고에 고려 문신 이암의 전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성이씨 후손인 이종영 선생은 환수운동을 전개하여 우여곡절 끝에 1995년 경남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되었고, 북관대첩비는 2005년 약탈 100년 만에 남북이 힘을 합쳐 반환받았다.

2006년 일본 도쿄대로부터 ‘기증’받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도쿄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2007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2018년 환수된 1책이 2019년 국보로 추가 지정되어 총 75책이 국보가 되었다.

국보 제185호 상지은니 『묘법연화경』은 고려 공민왕 22년(1373)에 제작한 불경으로 원소재지는 전남 영암 도갑사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가, 1969년 재일교포 김대현이 자신의 재산으로 이 7권의 책을 구입하여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금영측우기는 세종대왕 당시 전국에 설치한 측우기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라지자, 헌종 3년인 1837년 제작되어 충남 공주 감영에 설치한. 것으로 1911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여기서 금영(錦營)은 조선시대 충청도 감영(監營)을 이르던 말이다.

2005년 환수되어 2006년 고향인 함경북도 길주로 간 북관대첩비는 북한의 국보유적 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가 환수된 문화재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지광국사탑이 있다.

현재 일본 정부가 국보 등으로 지정한 한국 문화재, 미국으로 건너간 국새와 어보 등 왕실 유물, 하늘 아래 최고라 평가받는 헨더슨의 도자기 컬렉션, 한반도 전체 역사와 전 지역에서 수집해 간 오구라 컬렉션 등 앞으로 국보급 문화재의 환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1250호 30면, 2022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