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2)

돌덩이가 인질이 된 사연, 북관대첩비

경복궁 고궁박물관 인근에는 보통사람의 키보다 훌쩍 큰 비석이 서있다. 북관대첩비 복제품이다. 이 비석에는 몇 편의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그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 없을 만큼 기구한 운명이 숨어 있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과 승전비

1592년 5월, 조선 침략을 위해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해 한양도성을 점령했다. 무책임한 임금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갔고 갈팡질팡하던 관군들은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왜군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의병이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 백성들은 너나없이 일어나 의병대를 조직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의 의병은 패전을 밥 먹듯 하던 관군과 달리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의병들의 승전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것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벌어진 정문부의병대의 승리다.

왜군 부대 중에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이 연전연승하며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단숨에 한양을 빼앗고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도 길주로 내달렸다. 가토 부대는 이곳에서 임금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인질로 잡고 기세가 등등했다.

이에 정문부 장군은 왜군을 피해 도망하여 숨어 있던 백성들을 설득해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전투 경험도 없는 오합지졸인 3,000명의 의병으로 28,000명의 정예병 왜군을 기적처럼 물리침으로써 가토 부대에게는 쓰라린 패배를, 왜군 전체에게는 역사에 남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었다.

왜군의 패전 기록 북관대첩비, 일본군 야스쿠니로 끌고 가다

경복궁에 전시중인
북관대첩비 (복제품)

정문부 장군과 의병들의 싸움은 역사의 평가를 거쳐 100여 년이 지난 1707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의 손에 의해 길주군(현재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전승기념비로 세워지니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당시 전투 상황 등을 기록한 1500자를 새겼다. 이것이 북관대첩비다.

그 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은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고, “우리 조상들이 조선인에게 패전한 기록을 그냥 둘 수 없다”며 그 먼 길을 거쳐 대첩비를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북관대첩비를 전리품 취급하여 천황에게 바치는 예식을 치르고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로 보냈다.

끌려간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신사 뒤뜰에 방치된 채 모진 수모를 견뎌야 했다. 일제는 대첩비의 기를 누른다며 1톤이 넘는 돌덩이를 비석 위에 올려 놓았고 바닥은 콘크리트 더미로 처발라 놓았다. 북관대첩비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태로 그야말로 파괴될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일제는 심지어 비석의 내용이 전부 허위라는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마치 사람을 짐승이라고 학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인질이 된 대첩비, 남북이 힘 합쳐 100년 만에 환국하다

대첩비가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이었다. 선생은 야스쿠니신사에서 이 비를 발견하고는 1909년 <대한흥학보>에 대첩비의 소재를 알렸다. 1978년 재일한국인 사학자 최서면 박사는 조소앙 선생의 기고문을 보고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북관대첩비를 발견, 한국 정부와 언론에 알렸다.

정문부 장군의 후손인 해주정씨 종친회는 야스쿠니신사에 대첩비의 반환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 또한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반환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북관대첩비는 북한 지역에 있던 것으로 남북이 요청하면 반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2005년 3월, 한일 불교계가 중국에서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북관대첩비 원소재지 반환에 합의함으로써 더 이상 반환 거부의 명분이 없었던 야스쿠니신사는 2005년 10월 북관대첩비를 한국으로 반환하게 된다. 북관대첩비가 일제에 인질로 끌려간 지 꼭1 00년 만이다.

2006년 3월 1일, 개성에서 북관대첩비를 북측으로 인도하는 환송회가 열렸고, 4월 25일 경복궁에는 복제한 북관대첩비가 세워졌다. 본래 자리인 길주에는 진품이 자리하게 되었다.

문화유산의 가치와 반환 과정을 다 보여준 북관대첩비

왜 일본군은 돌덩이에 지나지 않은 비석을 그 많은 수고를 무릅쓰고 제 나라까지 끌고 갔던 것일까?

일본제국주의는 전승비라는 유물은 없앨 수 있지만 승리의 기억은 조선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승비를 없애기보다는 전리품으로 끌고 가 그들의 역사 말살과 왜곡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구나 관병과의 전투도 아닌 의병과의 전투에서 패한 기록은 일본 역사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을 게다. 조선을 빼앗기 위해선 ‘조선의 힘’을 말살해야 했기에 나라의 위기 때마다 들불처럼 일어났던 조선의병의 역사를 반드시 삭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북관대첩비를 야스쿠니신사에 방치할 때도 “비석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왜곡했던 것이다.

조소앙 선생이 남긴 한 줄의 기록이 후대에 이르러 살아 있는 소중한 정보가 되었다. 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사례이다.

북관대첩비가 1978년 한국에 소개된 이후 2005년 반환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견고하게 버티던 일본 정부도 결국 마지막 핑계를 “북한 소재 문화재이므로 북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이마저 남북의 불교계가 반환에 합의함으로써 반환을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 이로써 문화재 반환에 남북 공조가 처음으로 본격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관대첩비는 본래 자리인 함경도 길주로 귀환하여 북한 정부의 국보로 지정되고 상당한 규모의 보존지역이 마련됨으로써 100년 만에 귀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화유산은 본래 자리에 있을 때 그 기능과 가치가 구현되는 것이다.

1251호 30면, 2022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