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16)

미국은 일본을 향해 “우리는 중국국민당을 도울 것이며, 미국 내 일본자산을 동결할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즉시 철수할 것과 3국 동맹에서도 탈퇴할 것을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사실 일본 주재미국대사가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이미 11개월 전에 미국정부에 보냈지만, 미행정부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이 정보에는 느슨하게 대처하다가 뒤통수를 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 공영’을 꿈꾸며, 그 일환으로 미국령이던 필리핀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공격하면서 미국을 아시아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에서 진격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평양 군도 등에서 주도권을 잡고 태평양연안의 나라들을 점령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잘 나가던 독일군이 어느 날 스탈린그라드에서 30만 명이 포위를 당했고, 그 중 16만 명이 전사하고, 7만 명이 포로가 되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몽고메리 장군에 의해 독일의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이 쫓기고 있었다. 전선은 연합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1944년 6월 6일에는 사상 최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15만 명의 연합군이 프랑스 땅에 상륙하게 되면서 연합군의 승리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지중해에서는 하루 전(6월 6일)에 연합군이 로마에 입성했다는 승전소식을 전해왔고, 8월 25일에는 파리를 해방시켰다는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한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임명되어, 태평양군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필리핀을 탈환하였으며, 1945년 1월, 미군과 소련군이 나란히 독일국경에 진입했다.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세 사람이 얄타에 모여 전후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38선 이야기도 그들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도쿄에서 1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 섬과 이오지마 섬을 뺏기 위해서 미국은 7천명의 사망자와 19.000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4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어렵사리 함락시켜 전술적인 요새를 확보했다.

이제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세는 미국에 유리한 국면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오키나와 섬과 이오지마 섬은 도쿄에서 1200km 떨어져 있지만, 이 두 섬끼리도 대략 1200km 가 떨어져 있는 대단히 먼 거리에 있는 섬들이다.

1945년 1월, 루스벨트는 네 번째 대통령취임선서를 한지 3개월 만에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고, 트루먼(1884-1972)은 부통령이 된지 82일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앞에는 유엔설립, 연합국과의 관계, 미국의 경제문제, 일본과의 전쟁문제 등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제 남은 전선은 일본과 미국 사이의 전쟁뿐이었다. 45년 7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끼어들었고, 완강한 일본의 저항에 고심하고 있던 미국은, 때마침 뉴멕시코 주에서 비밀리에 행한 핵폭탄실험이 성공하게 되었고, 트루먼 대통령은 핵폭탄을 만지작거리며 사용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핵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대량살상무기’라며 사용에 반대했지만, 핵폭탄은 암호명 ‘리틀보이’라는 이름을 새로 달고 실전에 투입되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한꺼번에 8만여 명이 처참하게 녹아서 없어졌다. 3일 후에 두 번째의 핵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8월 15일에는 세계에서 가장 악하기로 유명한 일본이 두 손 번쩍 들고 항복을 했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고, 분통이 터지게도 친일파들은 다시 득세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폐허가 된 모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에서 큰소리치던 대장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대장들이 나타났다. 물러간 대장은 영국과 프랑스였고, 새로 오신 대장은 미국과 소련이다. 이 두 나라가 군국주의와 싸우느라 잠시 동맹을 맺었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두 진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물과 기름처럼 달랐다.

이제까지 영국의 영향권에서 있던 그리스와 터키는 소련이 욕심을 내는 대상이 되었고, 그밖에 중동, 이집트,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인디아, 중국 심지어 독일까지 어느 곳이던 닥치는 대로 소련이 욕심을 내는 나라들로 넘쳤다. 원래 미국은 패전국인 독일문제를 가볍게 생각했으나 소련의 야심이 드러나자, 급히 마셜 플랜을 준비해 엄청난 지원금을 독일로 보내 독일은 다시 부자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모택동의 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이 서로 싸웠고 소련은 모택동의 공산당을 지원했다. 결국 장개석은 대만의 작은 섬으로 쫓겨나게 된다(1949). 장개석의 국민당은 군사, 무기 등 모든 면에서 모택동의 군대보다 월등했으나, 부정부패로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결국 작은 섬으로 쫓겨나는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베트남점령군이었던 일본이 물러가자 옛 주인이던 프랑스가 다시 찾아왔다. 1946년 베트남의 호치민은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했고, 일본이 떠난 다른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옛 주인들이 찾아왔다.

소련군이 점령한 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속속들이 공산당정부가 들어섰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나라들은 힘이 없었다. 누가 조금만 도와주거나 유혹이나 겁을 주면 바로 그 꼬드김과 공갈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비틀거리는 정부들이었다. 미국은 1949년부터 51년까지 3년 동안 130억불의 돈을 유럽에 퍼부었다. 그리고 ‘트루먼 독트린’(경제지원, 군사개입, 세계경찰역할)을 발표하고 세계구석구석을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1949년 미국의 주도아래 유럽의 12개국이 NATO군사동맹을(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만들었고, 1955년에는 이에 맞서 소련의 주도로 동구권 8개국이 모여 ‘바르사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두 진영의 대결로 치열한 군비경쟁이 벌어졌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냉전시대(Cold war)가 시작되었다. 소련은 1949년 공산정부수립을 거절하는 체코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무자비하게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10월 18월, 114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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