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닥키와 비어즈

– 류 현옥

동료들은 그녀를 닥키라고 불렀다. 원래 이름 ‘닥그마’도 부드러운 스펠이 아니지만 닥키는 강한 억양으로 애칭이라기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친한 동료들 사이에 불리다가 닥키가 스스로 쓴 간호일지 말미에 서명으로 쓰기 시작하여 통용되었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면 어려웠던 시기와 연상되어 입맛이 씁쓸해진다.

줄담배를 피우는 그녀는 수시로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물었다. 흡연중독자들의 특징인 검지 끝이 흉하게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담배를 빨아 댕기는 습관으로 변모한 입술과 입근처의 근육이 보기가 민망하게 씰룩거렸다. 그녀는 밤 근무만 한다는 조건으로 채용된 간호사였다. 환자들 사이에는 담배냄새를 풍기는 간호사로 통했다. 환자들의 호소가 잦아지고 술 취한 상태로 근무를 온다는 저녁 근무자의 신고로 밤 근무 금지령을 받았고 오전 근무로 옮겼다. 처음부터 업무상 실수가 잦아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낮번을 하자 문제가 더 커졌다.

평생 늦잠을 자던 그녀가 아침 근무를 위해 일찍 기상하는 것은 체벌과 같은 것이었다. 습관이 되지 않은 일이라는 변명으로 근무 시작, 정시에 나타나지 않았고 여타 모든 회의시간에도 지각을 예사로 했다. 소문으로는 술집에서 즐기다가 늦게야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극심한 간호사 부족으로 근무표를 짜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늦잠을 이유로 해고를 시킬 수가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나에게는 언제나 공손했기에 부딪칠 일이 없었지만 다른 동료들과는 종종 말다툼을 했다. 훗날 나는 뜻밖에도 그녀가 지키고 있는 생활원칙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이 일을 하게 되는 주말에는 늦잠도 안 잤고 근무 중에는 담배도 덜 피우는 것 같았는데 정말 그렇게 애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심조심 가능하면 그녀와의 접촉을 피하고 일이 무사히 끝나는 것으로 만족했다.

비어지는 그녀의 짝꿍이다. 비어지 역시 버러깃트라는 원이름을 닥키가 그렇게 바꾸어 불렀고 동료들도 따라서 불렀다. 이 일로 근무 중에 환자들이나 환자 보호자들이 듣는 장소에서 친밀한 동료 사이에서만 통하는 애칭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상부의 지시가 있어 간호팀 회의의 토론 주제로 되기도 했다.

해마다 휴가철인 여름이면 직원 부족으로 스트레스의 강도가 두세 배로 늘어났다. 결원이 생기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경험도 없는 대학생들로 대체되었다. 간호사들은 근무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경험 없는 학생들의 일에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반복되는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딜레마였다. 닥키에게 같이 일하는 학생들을 관리하고 책임을 맡길 수 없다는 의견들로 쑥덕거렸지만 해결책이 없었다. 닥키는 오히려 여유 있게 “늙은이들 목욕시키고, 밥 떠먹여 주고, 기저귀 갈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을 가지고 뭐 그렇게도 전문적인 중요한 일이라고 능력 운운하며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왈가왈부 하느냐?” 는 말로 분위기를 선동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웃음거리로 받아 넘겼다. 환자가 입원과 퇴원도 잦아서 간호기록 문제, 상태에 따라 앰뷸런스를 불러 대학병원에 보내야하는 일은 닥키 자신은 상관할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한자리에 앉은 그녀 짝꿍 비어지는 수간호사에게 닥키를 책임질 테니 근무표를 그렇게 짜라고 부탁했다. 특히 닥키와 같이 밤 근무를 하면 책임지겠다고 했다. 다시 밤근무를 하게 된 닥키와 책임지겠다던 비어지가 함께 일하면서 인계는 뒤죽박죽이었고 실수투성이였다. 환자들의 대단한 불만을 들어주어야 했고 그 뒤처리로 동료들은 휴식시간도 없이 뛰어다녔다.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한여름이었다 . 전후에 지은 병원에는 냉방장치가 없었고, 한 방에 네 명씩 누운 노인환자들은 잠을 못 이루고 번갈아 부자를 눌러댔다. 체력이 약한 닥키는 복도의 벤치에서 잠들고, 비어지 혼자서 40여 명을 간호했다며 처음으로 불만을 호소했다. 주말이 지나면 간호부장을 불러와서 해결책을 찾도록 해야겠다는 말로 위로를 했다. 비어지는 언제 그랬냐는 모습으로 닥키와 어깨동무를 하고 자기 집으로 가서 잔다며 병동을 떠났는데 동료들은 의미심장하게 침묵의 눈짓을 했다.

여름이 끝나기까지 몇 주가 남았다. 휴가를 떠난 동료들이 돌아오기까지도 아직 몇 주나 남은 7월 말, 금요일 아침 인계시간에 비어지와 닥키는 이미 가운을 벗고 사복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며 대기하고 있었다. 동료 간의 적대심과 병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태도였다. 무슨 일로 벌써 가운을 갈아입었느냐고 묻는 동료에게 공격적으로 대답했다.

“시비 걸지 마! 오늘로 우리의 동료 사이는 끝나는 거야. 그러니 좋게 헤어지자고 …”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설명을 해야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인데 …”

“이제 더 이상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우리 둘이는 오늘로 근무를 마감하겠어. 오늘 저녁 밤번에 우리 둘은 오지 않겠어!”

“지금 주말인데 어디서 밤 근무자 두 사람을 구해? 지금 휴가철이라 사람 못 구해.”

“길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봐, 혹시 오늘 저녁에 와서 사십 명의 노망한 노인들을 밤새도록 간호하겠다고 할지 모르니.”

그러면서 닥키는 미리 준비해 온 여러 장의 복사본을 책상 위에 내놓았다. 낮과 저녁 근무 동료들이 쓴 것으로 닥키의 근무 중 실수를 지적한 프로토콜이었다.

“동료를 이런 식으로 모독하면서 어떻게 노인들 간호를 한다는 건지 알고 싶어! 이건 완전 모반이야!”

닥키는 면허받은 간호사들을 이렇게 모독적으로 능력을 부인하고 혹평하고 경험 없는 학생들을 불러와 대체하는 병원 당국의 처사는 법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주말 이틀은 밤 근무를 해주고 월요일 행정과에 가서 해결책을 의논해 보자며 사정해 보았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둘은 이유를 조목조목 적은 사유서를 첨가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발행한 즉시 효용 자퇴서를 내던졌다. 간호실을 떠나기 전에는 탈의실 열쇠가 든 봉투를 내놓으며 두 번 다시 이곳에 발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두 동료는 그날로 비어지의 두 아이를 데리고 동해의 섬으로 휴가를 떠났다는 후문이 들렸다.

지난 반세기 독일 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특히 근무를 통한 동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같은 예는 결코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법과 규율을 중시하고

노동윤리만은 철저히 지키는 독일인들에게 경험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나는 독일인의 부지런함과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의 철저함을 늘 존경해왔기에 너무나 놀란 충격으로 오래 기억 속에 남았다. 물론 이들은 돌연변이였음에 틀림없다. 나는 자주 두 동료를 회상한다. 독일 정부가 발표한 작년 통계에 의하면 간호사 부족의 실상이 대한민국에서 간호사를 데리고 와야 했던 70 년대보다 더 심각하다고 한다. 노인과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 대우를 개선하지 않았던 정부는 위기에 몰렸다. 보건사회부 장관은 동유럽의 여러 나라와 파독 간호사 노동 결탁을 하고 있다. 닥키가 언젠가 한 말대로, “노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하는 간호사를 무시하는 사회”를 정치인들이 해결하지 않은 결과이다. 닥키는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험악한 독일사회에서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연민을 느꼈지만, 도와주지 못했고 못된 동료들로 부터 보호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 세상 아무도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오직 기능공으로만 대하는 동료들이라고 규정하며 내가 건강하고 인간적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려면 병동을 떠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괴변이라고 일축하기에는 너무나도 날카로운 사회비평적인 글이었다. 나는 종종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병동의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녀 옆에 앉아 준 적이 있었다. 부수간호사로 승진하면서 그녀보다 2급이 높은 월급을 받고 그녀를 오직 기능적인 동료로 보게 되자 그런 인간적인 대화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졌다. 그녀의 의리가 비어지와 친하게 만들었고 두 딸을 데리고 혼자 사는 동료를 도와주기위해 애를 쓴 데서 시작되었다고 썼다. 닥키는 두 번의 이혼 이후 남자로부터 등을 돌렸고 비어지와 같이 두 아이를 키우자고 하는 지점에서 우정이 시작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비어지가 두 아이를 책임지는 홀어머니 역할에 닥키까지 책임을 질 것이냐고 말렸다. 사생활이라 간섭할 수도 없었지만 자세하게 아는 동료들은 쉬쉬하며 버어지의 사생활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를 꺼렸다. 노동 계약을 즉각 해제하고 일자리를 떠난다는 것이 그들과 두 아이의 장래 문제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 노동주의 인간적인 의무였다고 후에 가서 병원 당국을 원망하기도 했다.

남은 동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꺼렸고 입을 다물어 둘은 잊혀져갔다. 마치 물거품처럼 사라진 두 동료가 남긴 일화는 세월이 갈수록 의미를 더하는 일이 되었다. 닥키를 선두로 간호사 모두가 함께 파업을 선고하고 거리로 나섰다면 지금의 간호사 부족 사태가 예방되었을지도 모른다. 병원당국은 사표를 수리하고 서류를 정리를 하는 것으로 끝냈고, 그녀들이 비워 놓은 자리를 메우기 위해 스판다우 지역에 구인광고를 냈다. 부도가 나고 문을 닫았다는 미용실 주인과 애인을 따라 몇 년을 지중해 섬에서 살다 돌아왔다는 호텔카운터에서 일한 여자, 인생 초년병 학생들로 떠나간 두 동료를 대체했다.

그해 여름을 어떻게 넘겼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뒤통수가 뻣뻣해진다.

2019년 11월 15일,  1147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