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문화를 생각하며

3편: 설 떡국

류 현옥

정월 초하룻날 고국의 시간에 맞추어 국제 전화로 부모님께 새해인사를 드릴 때면 어머니는 한결같이 “떡국은 먹었나?”로 답하셨다.

50년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손수 끓인 설 떡국을 먹고 고향집을 떠났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는 형제들이 물려받아 변함없이 새해인사는 이 말로 시작된다. 막내남동생은 “노우야(누부야) 떡국 먹었나?” 했고 내가 “아니“ 하면 “그러면 안 되는데…” 했다. 나는 새해아침에 떡국을 먹지 않고도 새 달력을 벽에 걸며 떡국을 모르는 이국땅에서 한 살씩 더 먹어갔다.

어느 해는 오빠가 “거 떡국을 먹어야 새해를 바로 맞는 거야. 나이도 똑바로 한 살 더 먹는 거야. 그래야만 한 해를 잘 지내게 되어 있어. 외국에 살아도 그 정도의 고유한 풍습은 지켜야 할게 아니야?” 라고 하여 질책같이 들렸다. 설날 새벽에 온 가족이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떡국을 먹는데 의미가 있지, 혼자 앉아서 떡국을 먹어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답을 했다. 오빠는 어머니의 손맛 나는 떡국을 형제들과 함께 앉아 먹지만 외롭게 혼자서 무슨 맛으로 먹겠냐고 했다. 실제로 혼자 먹자고 서글프게 떡국집을 찾아다닐 수도 없고 쉽게 살 수 있는 식품이 아니었다.

몇 년 후 독일 베를린에 떡집이 생겨 한국식품점에서 떡국을 구입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어머니의 떡국은 특별했다.

섣달그믐날 불린 쌀을 홍두깨로 빻고 체에다 쳐서 쌀가루를 준비했다. 미지근한 물에 반죽을 하고 납작납작하게 떡국을 만들어 철판에 참기름을 치고 구워내어 소쿠리에 담아서 떡국을 준비했다. 소뼈를 밤새 고아서 맛있는 국물을 만들었다.

떡국은 새해 영시를 기하여 먹어야 한다며 아이들을 깨웠고 장롱속의 새 옷을 내어놓았다. 차례대로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설날 선물로 색동무늬의 양말을 한 켤레씩 나누어 주었다. 새 양말을 신고 새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시며. 영시를 기하여 온 식구가 둥근상에 둘러앉았다.

어머니는 작은 종지에 손수로 담은 정종을 조금씩 부어 당신의 다섯 자식들에게 돌렸다. 그래야 일 년 내내 눈도 밝고 귀가 밝아 잘보고 잘 들으며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고 했다. 아버님께는 더 큰 술잔에 부어 드렸다. 어머니 당신도 전례 없이 아버지 술잔으로 한잔 마셨다. 곧 떡국이 상에 올랐다. 소고기곰탕에 참기름에 구운 떡국을 넣어 끓인 후 구운 김을 비벼서 올린 맛은 일미였다.

떡국상을 물리면 아버지는 장롱 속에 보관해둔 토정비결 책을 펼쳤다. 역시 일 년에 한번 빛을 보는 책이다. 온 집안 식구의 그해 운세를 엄중하게 낭송하시기 전에 명심하여 들어 잊지 않고 주의를 해야 일 년 내 우환을 피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엄숙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가족의 새해 떡국 의식이 끝나면, 다음단계인 선조를 기리는 제사 준비로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시고 아버지는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마루에는 제상이 차려졌다. 내 자리는 비었지만 어머니는 몇 년간을 엄마의 떡국을 끓여서 네 명의 자식들을 앉혀놓고 정월 초하루의 정종 잔을 돌렸다.

오빠가 결혼하고 어머니의 새해맞이 떡국 풍습이 바뀌었다.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올케 가 섣달 그믐날이면 방앗간에서 만든 희게 빛나는 가래떡을 한 상자 차에 싣고 오면서 시작되었다. 온갖 다른 제사에 쓸 어물과 과일을 가져왔다. 어머니는, “우리 며느리가 부산 떡방앗간에서 맞춰온 귀한 음식이니 한번 묵어보소.” 하며 이웃으로 돌렸다. 고부간에 앉아 가래떡을 썰어 큰 사구에 물에 담가 준비했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집집마다 냉장고를 들여놓았고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떡국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상시로 생각날 때마다 끓어 먹을 수 있는 세상으로 변했다. 옛 문서에 “너 떡국 몇 그릇 먹었나?” 로 나이를 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 년에 한번 정초에 먹었던 떡국의 의미가 상실되어갔다.

새해의 출발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시작한 설은 보름간 계속되다가 대보름날로 끝을 맺는다. 일 년 중 제일 크고 밝은 둥근 달이 떠오르는 대보름이면 읍내로 향한 둑길 위에 달집을 짓고 달맞이를 준비했다. 온 동네사람들이 나와 달뜨기를 기다렸다. 제일 먼저 달을 본 사람은 그해 내내 만복을 받고 노처녀 노총각은 짝꿍을 만난다고 믿었다.

달의 한 모퉁이가 보이면 모두 환성을 지르며 달집에 불을 붙였다. 아이들은 한겨울의 추위를 불꽃으로 몸을 녹이며 불타는 달집을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달집의 기둥까지 타고 불길이 사그라지면 양철 냄비에 담아 준비해온 검은 콩을 뽁아 먹으며 밤을 새웠다.

정월 대보름에는 일곱 가지 곡물을 넣어 큰 솥에 그득하게 밥을 짓고 아홉 가지 나물을 맛있게 무쳐서 큰 뚝배기에 담았다. 온 식구가 먹고 이웃사람에게도 나누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먹고 가라고 상을 내놓았다. 만나는 동네사람들은 “보름밥 먹었는겨?” 인사말을 나누고 어머니는 “청주 한잔 마시고 가소.” 하며 끌어들였다. 혼자 사는 노인댁에는 보름밥을 싸서 방문했다.

내가 추억에 잠겨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흥미 있게 들은 독일친구들은 동화 같다면서 감동한다. “아름다운 음식문화야! 평생 빵과 고깃덩어리와 감자를 먹고 살은 우리는 그런 추억이 없어. 디아스포라의 특권으로 기억 속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네가 부러워. 자라는 한국2세들에게 물려주고 계승되어야 할 중요한 풍습으로 문화재로 보호를 할 일이야.”

이런 풍습이 시행되고 계승되려면 시간적 여유와 공간 속에 한없는 어머니의 정성이 필요하다. 허지만 어머니의 뒤를 따라 이 모든 것은 사라졌다.

칠순을 지나면서 해가 갈수록 더 자주 어머니를 생각한다. 쉴 새 없이 일을 하신 어머니는 무슨 재주로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을까?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과 함께 정서를 키워주는 시간적 여유가 절실하게 아쉬워진다.

2020년 4월 10일, 116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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