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병든 자들의 천국

중세유럽 프랑스 부르고뉴지방의 ‘호텔디유(Hotel-Dieu)’ 본(Beaune) ➀

재독화가 황수잔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리는 프랑스 부르고뉴지방은 로마네스코 문화유산과 예술과 역사를 지닌 오랜 전통을 지닌 뛰어난 명포도주 산지로 유명하다.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부르고뉴지방은 화려했던, 그 옛날의 발자취를 회상해 볼 수 있는 중세 유적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포도주 생산지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대표적인 음식문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과거 왕국의 중심도시였던 디종(Dijon)은 이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호텔디유(자선병원)가 있는 본(Beaune)은 인구 2만 5천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로 디종에서 45km떨어진 남쪽에 있다. 주위가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름다운 포도밭 파라다이스로 전 세계 포도주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부르고뉴지방에서 생산되는 명포도주 직매장이 즐비하고 이곳에서 직접 시음할 수 있다. 곳곳에 즐비해 있는 부르고뉴의 전통적인 음식을 맛보기 위해 프랑스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저마다 개성 있게 꾸민 크고 작은 노점상들이 환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중세 유적지를 좋아하는 이곳 시민들은 오래된 고풍적인 건물들 속에서 생활공간으로 살고 있다.

우리들 부부는 그들 속에 어울려 타임머신이 멈춘 것 같은 중세성곽에 둘러싸여 백년이 지난 고풍적인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전통음식을 맛보면서 그 옛날의 찬란했던 이곳 문화를 회상하고 중세의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호텔 디유(자선병원)

신의 저택이라고 부르는 웅장한 호텔디유 입구 마당을 들어서니 빨강, 노랑, 갈색, 초록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장식한 우뚝 선 고딕양식 건축양식으로 동화속의 궁전처럼 환상적인 호텔디유가 보였다. 굶주림과 빈곤으로 가난한 병든 자들이 무료로 치료받고 살았던 자선병원이 마치 귀족들이 사는 궁전처럼 화려하고 고품격인 건축물에 우리들은 놀라 탄성을 질렀다.

지붕은 연노란색을 주조로 한 색색으로 에나멜(니스)을 발라 윤기가 흐르고 중세 고딕양식인 기하학적 문양으로 인도 스타일의 느낌을 주는 신비하고 이국적이다.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만든 크고 작은 아기자기한 창문들, 지붕의 다양한 양쪽 날개의 디자인도 이색적이다. 탁월한 예술성이 짙은 화려한 고딕양식 건축은 부르고뉴의 법관 롤랭이 가난하고 병든,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자선병원을 건축하고 싶었다. 플랑드르(Flandern), 지금의 벨기에를 자주 여행하면서 북쪽 시립병원 건축물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곳을 모델로 전문적인 예술가들에 의해 뛰어난 건축설계로 지붕과 병실의 구조와 분위기를 예술적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기품 있는 호텔디유, 자선병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니 중앙 홀 중심으로 조화를 이룬 성화그림들이 많이 걸려있다. 예수님의 기적에 관계된 성화들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영혼의 안식처가 되도록 했다. 성경의 소재로 그린 수많은 성화그림들은 예수님이 늘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지켜주시고 치료하시고 돌보시는 이곳이 그들의 천국이었다. 복도는 수녀 간호사들이 다닐 때 비나 눈에 젖지 않도록 지붕이 깊게 덮여있다. 길가로 이어진 병원입구는 화려한 호텔디유의 이미지와는 달리 무척 단조롭고 검소하다. 그렇게 보이게 해서 도둑이나 강도를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당시 호텔디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선병원으로 중세 고딕 건축건물 이였다. 1443년 건축된 호텔디유는 1958년 까지 법관 롤랭이 생전에 모토였던 가난한 병든 자들은 누구나 이곳에 와서 무료로 치료받고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다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영적 인도하는 곳으로서 호텔디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환자들이 거쳐 갔다고 한다.

France, Burgundy, Bourgogne Beaune. Hospices de Beaune Hotel Dieu. This hospital was built in 1443 by Nicolas Rolin, Chancellor of the Duke of Burgundy, Philip the Good.

호텔디유(Hotel-Dieu) 건립동기

“1443년 8월4일 일요일 Autun 시민이며 부르고뉴(Burgund)의 법관인 나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은 사후의 자신의 영혼구제를 위한 가난한 병든 자들을 위해서 호텔디유, 자선병원을 건립할 것을 하나님과 성모마리아에게 선서합니다.”

대법관 롤랭은 호텔디유 건립동기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백년전쟁(프랑스, 영국)이 종료되고 부르고뉴 주민들은 전쟁 후유증으로 굶주림과 빈곤 질병으로 허덕이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구원자로 희망의 빛을 비쳐준 사람은 이 지방의 법관인 롤랭과 부인(Gigone de Salins)이였다. 당시 그들 부부는 거부이면서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구제를 위해 가난한 병든 자들을 위해 호텔디유를 건립하는데 전 재산을 기부했다. 상관인 영주 Philipp이 후원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곳을 운영하는 자금으로 소금제조원과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포도밭을 기증했다. 포도밭은 5백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재배하고 있다.

당시 법관롤랭(Kanzler Rolin)이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전쟁 후 전 유럽에 번진 페스트(Pest)와 홍역(Masern)그리고 인플루엔자, 유행성 독감 이였다. 가난한 병든 자들은 기아와 굶주림으로, 무서운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법관 롤렝은 외부와의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텔디유 입구는 작은 문만 사용하도록 했다.

외부와의 공기가 차단됨으로 내부의 공기는 무척 혼탁했다. 그래서 사용하게 된 것이 신선한 향이 있는 향료(aromatische Duftstoffe)였다. 프랑스 향수가 세계에서 고품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전후의 모든 물이 오염되어, 오물냄새가 진동하여 사람들은 오래도록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몸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향료가 점차 발전해서 지금의 세계적인 향수가 되었다고 한다.

1452년부터 환자들의 공동병실(der grosse Armensaal), 72x14m 높이20m로 넓은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앙에는 환자들이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있고 접시는 당시 서민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나무그릇이 아닌 노블한 주석그릇(Zinn)을 사용했다. 양쪽 벽으로 환자들을 위한 15개의 침대가 각각 놓여있었다. 침대 밑에 그들의 트렁크가 놓여있어 간호사들이 옷들을 정리해 주었다.

침대마다 목재로 된 칸막이가 세워졌고 앞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매일 마다 보는 미사예배 때는 열어 놓았다. 1459년부터 경건단체교단 (Beqines venues de Maline)에서 수녀님들이 의료 교육을 수료하고 봉사 했으며 신부님들은 미사예배를 인도했다.

1461년 법관롤랭이 사망하고 부인 Guigone de Salins가 병원을 경영하게 되었다. 1645년 ‘Saint-Hugues Saal’병실이 파리정부의 도움으로 지어졌고 1658년 Ludwig 14세가 호텔디유를 방문했을 때 남,여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환자실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는 궁으로 돌아가서 즉시 기부금을 보내어 남, 여 중환자들을 분리해 사용할 수 있는 ‘Saint-Louis Saal’ 병실이 지어졌다.

부호들은 당시 부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영혼구제를 위해서 많은 기부금을 헌납함으로 호텔디유는 재정적으로 안정되었고 공동병실은 아름다운 실내장식으로 궁전처럼 화려했다. 160개의 많은 환자들을 위한 침대가 놓여졌다.

호텔디유는 그 지방에 있는 작은 병원들이 합쳐지면서 대형병원이 되었다.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500년 이상이나 병원으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척 경이롭다. 지금은 수많은 전문적인 예술인들을 통해 아름다운 실내장식과 성화의 미술품들을 간직한 이곳은 프랑스의 국보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쟁 후 가난과 질병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던 당시 전 재산을 바쳐 그들을 돌본 법관 롤랭(Kanzler Rolin)과 그의 부인(Guigone de Salins)의 아름다운 감동 이야기, 호텔디유 자선병원의 발자취를 보기 위해서 해마다 수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법관 롤랭 부부는 호텔디유를 운영하는 자금으로 기증한 포도원이 수백 헥타르에 달하며 500년을 넘은 오랜 세월동안 운영하고 있는 포도밭은 1859년부터 11월 셋째 일요일에 열리는 고품격인 이곳 포도주 경매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경매된 포도주는 전 세계에서 최상품으로 최고의 고가격으로 판매된다. 수입금은 가난한 병든 자들을 위해 쓰여진다고 한다.

호텔디유 내부의 기도실, 병실, 약제실, 샹트아나, 주방이 고급호텔처럼 화려하다.

제단그림(Polyptychon)

예배실 중앙에 펼쳐진 제단화는 15세기 법관롤랭의 주문에 의해서 그려진 걸작품 ‘최후의 심판’으로 벨기에 화가 Roger van der Weyden이 그렸다.

최후의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신 모습이다. 예수님은 머리에 찬란한 무지갯빛이 일종의 금빛후광으로 비치고 왕의 상징인 자주빛 망토를 걸치고 있다. 천사장 미카엘이 월계수(천사장 미카엘이 인간의 죄악을 공정한 저울에 단 후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지시한다.)를 들고 서 있다.

양옆에 하얀 옷을 입은 천사들이 인간들의 죄를 위해 대신 지셨던 십자가와 옆구리를 찔러 피 흘렸던 창을 들고 서 있다. 그 밑에 천사장 미카엘이 눈처럼 흰 하얀 옷 위에 대조적인 붉은색, 금색의 무늬가 있는 화려한 천사의 날개를 달고 양손에 정의의 저울을 들고 근엄한 표정으로 저울 위에 놓여 있는 사후의 인간들의 선과 죄악들을 달고 있다. 양 옆에는 천사들이 재림을 알리는 나팔을 불고 있다.

그 밑으로 오른쪽 왼쪽에 세례요한과 성모마리아가 무릎 끊고 예수님께 인간들의 심판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안타깝게 두 손을 모아 간구하고 있다. 주위에는 12제자들이 양옆에 있고 부르고뉴의 교황과 성인들 기부금을 많이 낸 부유한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밑에는 사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유황불이 타고 있는 지옥이고 왼쪽에는 천국인데 천국은 호텔디유 입구가 그려져 있다. 이곳은 천국으로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 그림은 프랑스의 국보 문화재로 무척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림이 있는 전시실에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으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서 감독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서 있다.

대형 걸작품 ‘최후의 심판’은 당시 일요일이나 축제에만 볼 수 있었고 평일에는 4면으로 접어 뒷면의 그림을 보게 되는데 이 그림은 회색의 어두운 톤으로 되어있다. 중앙에는 성모마리아와 성인Sankt Anton, 호텔디유 수호성인들이 오른쪽에는 부인 Guigone Rolin과 왼쪽에는 Kanzler Rolin이 마주 앉아서 두 손 모아 무릎을 끊고 기도하고 있다.

기도실(Kapelle)

공동병실과 연결되어 있어 필요할 때 언제나 기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법관롤랭의 부인 Guigone de Salins가 청동관에 묻혀있다.

약제실(Apotheke)

약제실 1호실에는 사람들이 약초로 만든 약을 만드는 과정이 1751년 화가 Michel Coquelet에 의해 자세하게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중세 당시에는 표준화된 조제된 약이 없었으므로 병원마다 속한 약제실이 있었다. 그들은 약초를 재배하고 말리고 찧어 가루로 만들거나 또는 끊이거나 약초를 짜서 액을 만들어 저장했던 함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2호실에는 약을 보관하는 함이 130개나 된다. 바르는 약(Salben) 기름, 알약, 시럽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유리병에는 특별한 약들(지네, 가제 눈알,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을 말려 가루로 만들었다)이 들어있다.

약들은 약제사의 처방에 의해 간호사가 약초를 준비하고 저울에 단 다음 청동 절구통에 찧어 가루를 내거나 즙을 만들었다. 약제의학(Pharmazeutische Wissenschaft)이 이곳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당시 환자들이 마취가 안 된 상태에서 수술하는 그림들과 함께 대형 주사, 칼, 톱 모양인 수술기구들을 볼 수 있다. 500년 전 중국이나 한국의 한약처럼 약초를 재배하고 곤충을 이용해서 약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당시 의학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다. 약을 찧는 청동 절구통이 당시 처음으로 1760년 본 약제사 Claude Morelot에 의해 사용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2020년 4월 10일, 1166호 30-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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