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문화를 생각하며

4편: 동지팥죽

류 현옥

어머니는 단골 곡물상을 지날 때마다 팥을 한 움큼 손에 쥐고 들여다보았다.

“묵은 팥 아닌 겨?”

“아지매, 나는 묵은 팥 안 판다 카는 데도 올 때마다 물어보네. 딴 집에 가소. 그런 좋은 팥 있는가?”

“안면보고 찾아오는 데 딴 데 가라 카면 되는 겨?”

“올 때 마다 속 태우는 소리하니 안 그러는 겨.”

“그래도 몇 년을 사주지 않았는 겨!”

어머니는 다음 가게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 팥을 한 움큼 쥐고는, 만지며 눈을 가늘게 뜨고 비교를 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는 다시 단골 곡물상으로 돌아가 팥을 샀다. 팥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곡물이다. 식구들 생일이면 팥을 넣은 찹쌀밥을 했고, 찰떡 팥고물로 썼다. 송편 속은 물론이고 술떡을 할 때 듬성듬성 섞어 넣었다. 이스트를 넣어 만든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 으깬 팥을 속에 넣고 찐빵을 쪄냈다. 어디든 팥이 들어가야 된다고 하였다. 팥은 맛도 중요하지만 그 색갈이 우리음식에서 꽃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특별히 동지팥죽을 위해서 좋은 팥을 골라 미리 준비했다. 일 년 중 밤이 제일 긴 날, 잡귀신들이 숨어들어오지 못 오게 팥죽의 붉은 색으로 방어를 한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동짓날을 작은설이라고 했다. 동지가 지나고 설날을 기다리면서 어린 나는 작은설이 큰 설보다 먼저 오느냐고 물었다. 어머니의 설명으로 일 년 중 밤이 제일 긴 동짓날이 지나면 다시 날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새해로 들어가고 정월 초하루 큰 설날을 기다리며 준비를 한다고 했다. 많은 명절이 모두 음력을 따르는데 팥죽을 먹는 동짓날은 태양력에 맞추어 정해진 유례를 나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전날 저녁에 찹쌀가루로 새알을 만들어 장독간에 내다놓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온 집안 청소를 하시고, 특히나 집안 구석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긴 빗자루로 걷어 내었다. 대청마루 밑을 청소할 때는 나를 불렀다. 몸이 작은 내가 빗자루를 들고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대청 나무판 사이로 떨어져 모인 쓰레기를 쓸어냈다. 장작불을 피워 큰 밥솥에 대량의 팥을 넣고 끓이면 온 집안은 구수한 팥향기로 채워졌다. 푹 익은 팥을 식혀서 주물러 팥국물을 내어 찹쌀 반 멥쌀 반을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가서 새알을 넣는다. 찹쌀로만 만든 새알이 흐늘흐늘하면 팥죽이 다 되었다. 남은 불길에 죽이 타지 않게 손잡이가 긴 나무주걱으로 계속 젓는 일은 아버지가 맡았다.

어머니는 집 뒤의 소죽솥에 데운 물로 목욕재계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비녀를 바로 찌른 후 부엌으로 돌아와, “이제 고만 저어도 되겠네.”하며 아버지를 밀어냈다.

작은 상에 삼시랑(삼신할미)을 위한 팥죽상이 차려지고 어머니는 두 손을 비비며 천지신명을 불러 가족을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참박으로 만든 쪽바가지에 팥죽 국물만 떠내어 담아들고 온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숟가락으로 뿌렸다. 일 년 내내 온갖 잡귀신들이 팥죽의 붉은색을 보고 가까이 못 오도록 경고하는 의례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니는 나에게는 눈여겨 잘 봐두었다가 시집가서 시어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은근하게 다짐을 주었다.

나는 동짓날인 12월 23일이 생년월일로 기록된 여권을 들고 고국을 떠났다. 어느 누구도 이 날은 내 생일과 관계없는 날이라는 것을 몰랐고 나 역시 출국서류를 할 때 내손으로 기입을 했던 날짜임에도 미심쩍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미숙한 성인여성으로 부모 곁을 떠나게 된 혼란 속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남의 집 며느리로 가서 팥죽으로 귀신을 쫒지 않아도 되는 이국으로 떠나왔다. 짐을 싸는데 어머니가 준비한 작은 보따리를 가져와서 내 옆에 앉았다.

“니 생일 밥을 내가 해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니가 해 먹어야 한다. 이 거 찹쌀 반 되와 좋은 팥 한 움큼, 미역 두 오래기 같이 쌌다. 마른명태도 잘라서 한 마리 같이 쌌어, 잊지 말고 생일 밥은 챙겨 먹어야한다!”

어머니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날짜 명심했다가 잊지 말고 해먹어라.” 그리고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코를 푸셨다. “니 생일 생시를 적은 쪽지가 찹쌀 봉지에 들어있다, ‘섣달 초나흘 인시(새벽4시)다.” 어머니도 나도 비행기를 타고 가서 살게 되는 땅이 다른 달력 날짜가 통하는 서양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다. 나의 생일 인 음력 섣달 초나흘이 양력으로 언제가 되는 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싸준 생일 음식 뭉치는 풀지도 않은 채, 나도 모르게 생일은 지나가고 다음해에 들어서 붓글로 쓴 어머니 편지를 받았다. “니 생일에 니 생각하고 찰밥을 해서 온 식구가 둘러앉자 먹었다. 니도 생일밥 해먹었나? 니 오빠말로 그곳과 이곳의 시차가 틀려 하루 늦게 다음날 생일밥을 해먹었겠구나!” 당시 편지가 얼마 만에 도착했는지는 모르나 나도 어머니께 답장을 써서 보낸 것 같은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섣달초나흘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이 낳은 딸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집안 식구들 역시 여권에 기록된 생년월일 12월 23일이 통하는 세상에서 음력생일 날짜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수간호원의 선처로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휴근을 받았다. 노동 계약 3년 동안 살게 된 기숙사 지붕 밑 단칸방으로 동료들이 꽃다발을 들고 와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에 태어났다며 “한국에서 온 크리스챤 아기!” 라고 하였을 때도 건성으로 들었다.

몇 년이 지나 귀국하여 호적에 오른 내 생년월일이 나의 진짜 생일과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니 아버지가 읍사무소에 가서 호적에 그렇게 올려서 그렇다. 진짜 생일에 찰밥을 해먹으면 되는 기라.”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께 음력이 안 통하는 진짜생일날을 알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에 음력 달력이 없어 진짜 내 생일이 어느 날인지 알 수가 없다고!?” 듣고 있던 남동생이 발칵 했다.

“누부야, 계산해서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카던데!”

그때는 이미 내가 십여 년을 가짜 생일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생일 축하인사를 받고 살아온 후였다. “그런 건 니가 챙겨야지, 누가 해주나? 미리미리 연초에 편지로 날짜를 물어오면 우리가 알려 주었을 텐데 왜 안했나?” 오빠가 혀를 차며 기가 차다고 했다. 나는 변명하기를 호적에 올린 가짜 생일이 독일 관청을 통해 고용주에게 알려지고 일터의 생일기록부에 올려져있고, 동료들이 그날 꽃다발을 준비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생일 케이크를 사서 동료들을 초대하여 생일 파티를 했다고 했다. 진짜 생일 날짜 찾아서 찰밥을 해먹어봐야 서글프기만 할 테니 안한 거지. “누부야는 독일에서 완전히 가짜인생 살았네!” 막내남동생의 말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호적계에 있던 석골댁 희철이 그놈이 음력날짜로 올릴까 물어보기는 했어. 호적신고에는 양력으로 올리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어느 날에 올리던 날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거든. 음력으로 올려놓으면 해마다 양력으로 다른 날짜가 된다 카면서. 양력으로 올리면 태어난 날짜와 연관이 없다 안 카나. 한마디로 양력으로 올린 생년월일은 태어난 음력날짜와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날짜라 안 카나. 알아서 호적에 올려 드릴 테니 집에 가시라고 해서 그놈 믿고 한잔 마시러갔지.”

어머니는 일 년에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짓날 12월 23일은 변하지 않는 데 그렇게 정신 사납게 복잡한지 알 수가 없다고 하시다가 하기야 동짓날에 옥이 생일밥을 해먹은 적이 기억이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 양력을 믿을 수가 없는 가베라.” 그런데 동짓날이 왜 옥이 생일로 올라가 있는 지 알 수가 없다며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허이 석골댁 희철이 그놈 탓이라 안 카나!”

“아버지, 남한테 둘러씌우지 마쇼. 귀한 딸 출생신고 하러가서 태어난 날짜를 덜된 몸한테 맡긴 게 잘못이지!”

먼 친척벌 희철이는 이미 고인으로 되었기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날이 동지팥죽을 먹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장도 볼 겸 읍사무실 호적계에 들려 옥이 출생신고를 하겠다고 하며 집을 나가 해질 무렵에야 돌아오셨다. 걱정하며 기다리던 어머니가 부탁한 자반도 안 사들고 한잔 걸치고 돌아 오셨단다.

어머니는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아이를 등에 업고 뜨거운 죽솥 앞에 서서 주걱으로 젓는 데 죽도록 힘들었다며 시비를 걸어 분풀이를 하였고 팥죽도 한 그릇 같이 안 먹은 동짓날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다음해 동짓날이 오기를 기다려 나무로 긴 주걱을 만들었고 해마다 동지팥죽 젓는 일을 도맡았다.

호적계 희철은 그날을 나의 생년월일로 올렸다. 호적에 오른 날짜가 내 생일로 효력을 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반쪽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되었다. 여행이 끝나 서울 여동생 집에서 출국준비를 하기 위해 며칠 머무는 동안 또 나의 생일 날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동생은 어머니가 잊지 않고 해마다 나의 진짜 생일인 음력 섣날 초나흘에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오늘이 독일에 간, 니 언니 생일이다. 니 언니 생각하며 팥 넣고 찰밥해 먹었다. 니라도 가까이 있으면 같이 먹었을 것인데… 니 언니는 지 생일이나 알고 사는지 모르겠다.”

“엄마! 서양 사람들은 우리보다 생일 더 많이 챙기고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 을 붙이고 노래를 하고 한다는데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를 했단다.

“근데 언니 ! 정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섣달 초나흘이 양력으로 며칠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가짜 생일날을 지냈어?”

“가짜고 진짜고 일 년에 한번 지내면 될 거 아니야!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 입으로 불어 끄고, 케이크를 자르는 것으로 끝내는 생일날이었어! 꽃다발이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슬픔을 느꼈다. 어머니는 그것도 모른 채 같은 날 팥죽을 끓였고 새알을 내 나이만큼 세어서 죽사발에 떠놓았다고 동생이 말했다. 동생은 남의 아파트에 전세로 살다보니 팥죽을 끓어 뿌릴 수도 없어 동지팥죽은 끓이지 않는다고 했다.

2020년 5월 8일, 1170호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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