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판과 딱 한번의 2차

최월아

나이가 들면서 믿지 않던 운명과 팔자가 숙명에 뒤엉켜 다가온다.

둥실한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땐 비쩍 마른체구에 키는 껑충 컸다. 흰 살결의 얼굴에는 죽은 깨가 있어 놀림도 꽤나 받았다. 거기에 외향적이던 내게 주위사람들은 자주 ‘외국 아이 같다. 외국 가서 살 아이“ 라고 했다. 지나가던 점쟁이도 내 상판이 ’외국 가서 살 팔자‘라고. 외국에 대한 인식이 무디던 때였기에 말뜻에 비중을 두지는 않았지만 바라지 않던 재외동포로 살다보니 이 말들이 상기된다.

학교 다닐 때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다. 따라서 겁 없이 지망한 대학입시에 당연히 불합격. 그러고도 예상 안한 낙방 후의 난감함과 민망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냥 부끄럽고 창피해 기죽어 지낼 때 일간지에서 ‘국립의료원 간호학교 국비장학생 2차 모집-수업료와 기숙사 숙식비 및 학생복 등 전액장학금 지원-’을 봤다. 전혀 안중에 없던 간호사가 되는 길이었지만 마침 쥐구멍이라도 찾던 심정일 때라 ‘기숙사’가 구세주 같았다.

고3 담임이셨던 노순주 선생님께 의논을 했더니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 주셨다. ‘NMC에 아무나 가는 게 아니고 스칸디나비아가 어쩌고~~’ 하시며 월아는 키도 크고 하니 간호사가 되어 미국가면 참 좋을 거다, 하셨다. 이렇게 선생님도 미국갈수 있는 여건을 말씀했지만 서울에 살던 나에겐 기숙사 외엔 탈출할 곳이 없었을 뿐이다.

국립의료원(NMC: National Medical Center)은 스칸디나비아 3국과 UNKRA가 의료지원을 위해 공동성안으로 설립했다. 1958년에 대한민국 대통령 령 제1337호로 유럽식 현대병원 메디컬센터 건물이 준공되어 낙성식을 갖고 이듬해인 1959년에 간호학교가 신설되었다. 1968년에 정부에서 인수하였다. 간호학생들은 전교생 모두 전액장학생이었다.

전쟁 후 나라가 가난하던 그 당시 일반대학 진학이 어려운 가정환경의 수재들이 몰려들어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전교생 모두 유럽식 아담한 2층 건물 기숙사에서 숙식제공이었던 까닭에 전국의 일류고등학교를 졸업한 우수생들이 많이 지망했다.

NMC 간호학교는 이 높은 입시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일반대학보다 먼저 특차로 입시시험을 치러왔다. 그러다 간호사들이 미주와 독일에 취업해 가면서 간호사가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국가정책에 의해 간호사 양성을 늘였다. 이에 국립이던 NMC도 1969년에 이미 특차를 마쳤으나 신입생 정원수를 더 늘이기 위해 2차로 추가모집을 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기숙사입사에 혹해 응시를 했다.

NMC 역사에 전무후무한 ‘딱“ 한 번의 제2차 시험 역시 높은 경쟁률이었지만 내 상판의 운명인지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지망하던 전공을 포기하지 못해 입학을 무척 망설였다. 결국 입사하는 날 맨 마지막신입생으로 등록 했다. 그러나 졸업하기까지 12번도 더 그만 두려했다. 그 핑계로 공부를 안했는데도 용케 졸업을 하고 캡을 썼다. NMC는 학점 미달이 엄중하여 입학동기들 중 여러 명이 퇴학을 당했는데 내 운명은 날 졸업시켰다.

이미 NMC의 많은 선배들도 미국병원에 취업해 갔다. 동문들 중 아예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 줄 알고 입학한 경우가 많았지만 난 문외한 이였다. 따라서 많은 동기들이 졸업을 하자마자 당연한 듯 미국비자를 신청해 놓고 영어학원과 운전면허 학원을 다녔다. 난 그들이 해외에 가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비자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던 친구들이 점을 보러간다 했다. 친구들은 떠날 날이 궁금한 마음을 풀고 싶어 했고 나는 재미삼아 따라나섰다. 희한한 점쟁이는 방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힐끗 쳐다보며 ‘너거 물 건너 갈라카네” 했다. 그리곤 5명의 친구들의 사주팔자, 생년월일에 이런 저런 토를 달아 모두 떠날 날이 멀었다고 했다. 그러다 점 볼 생각 없이 한옆에 비켜 앉은 날 가리켰다.

“니는 상판에 벌써 한발을 물 건너에 걸쳐 놓고 있는데 와 멀쩡이 있노? 사주 넣어 봐라” “아뇨, 괜찮아요. 전 안 봐요.” “돈 달라 안 한다 생년월일이 뭐꼬?” 하는 수 없이 알려 준 생년월일을 훑어보고는 “니는 금방 갈거네. 그라고 아예 거서 살겠다.” 했다. 그놈의 상판소릴 또 듣고 돌아오는 길에, 훗날을 짐작 못한 채, 돌팔이 점쟁이라고 흉을 보며 낄낄 거렸다.

아뿔싸! 지나고 보니 그 점쟁이가 참으로 용했다. 함께 갔던 친구들 모두 그 점쟁이 의 그 점괘, 생각지도 못한 이유들로 인해, 예상보다 좀 늦게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그 당시 NMC 생들에게는 물 건너는 단지 미주였다. 그런데 점을 본 그 몇 달 후에 생각지도 않던 파독에 어처구니없이 휩쓸렸다. “딱 3년만” 이라는 경숙의 꼬임으로 NMC 졸업생 중 첫 파독케이스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친구는 딱 3년 만에 귀국하고 나는 그 점쟁이의 점괘처럼 영영 재외동포로 살고 있다. 내 상판과 딱 한번의 2차 시험이 얽혀있었나 보다.

동기들은 졸업 후 지구 여러 곳에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다. 우리들은 2022년에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로 계획했는데 못 기다리고 지난해 칠순기념이란 명목으로 앞당겼다. 각국에서 날아 온 친구들은 서울 더 케이 호텔에 집합했다. 사정상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과 전 학장 및 교수 그리고 총동문회장 등 선배 몇 분을 모시고 전야제를 치르며 오랜만의 서먹함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들은 편안한 28석의 프리미엄 관광버스를 타고 영국여왕과 황태자가 다녀간 안동하회마을, 찬란한 신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 내 고향 부산 해운대, 해동 용궁사, 감천문화마을, 태종대와 아름다운 거제의 해금강과 유럽의 그 어느 보타니아 정원에 뒤지지 않는 외도, 풍차가 돌고 있는 농소 몽돌해변을 다니며 칠순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자부심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 들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단풍에 휩싸인 채 찬란한 해살이 고즈넉이 내려앉은 경내를 배회하며 고국의 가을을 만끽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 뒤섞여 여기저기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일주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헤어지기 전에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고 멋스럽게 차려져 나온 고급스런 한식으로 몸무게를 좀 더 불렸다. “아~, 한국이 참 좋다!“ 하며 후식으로 전 학장이 들고 오신 케이크에 커피를 마시며 모교의 우여곡절 뒷이야기에 취해 일어서기 아쉬웠다. 그러다 곧 2022년에 다시 만날 희망으로 서로의 건강을 빌며 일어섰다.

느닷없이 전 세계를 휩쓸며 삶의 자유를 앗아간 COVID 19로 인해 생긴 한가함에 동기그룹 톡방에서 여행 후담을 나눈다. 천만다행으로 칠순모임이 지난해였음에 ‘복“ 받은 우리라 자찬도 한다.

2022년 기념행사는 캐나다의 록키 마운틴에서 단풍의 절경을 함께 바라보기로 며칠 전에 결정이 됐다. 축복이다! 이 동기모임이 아니면 이 나이에 그 유명한 아름다운 록키 마운틴을 언제 어떻게 가볼까 하며 신나게 기다린다.

그때까지는 코로나가 이 지구상에서 싹 사라지지고 모두 건강 유지하다 다시 만나길 기도 할 일만 남았다.

2020년 6월 12일, 1174호 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