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철 아동을 소개 합니다

평양 음대를 졸업하고, 모스코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을 졸업한 정요한 집사는, 유명 콩쿠르에서 여러 번 입상하고, 8년 동안, 김정일 전용음악단의 단장과, 평양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동유럽에서 교환 교수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현지의 외국인 교수 한 분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정 교수님, 저와 함께 교회에 나갑시다> <미안 합니다. 저는 교회에 갈 수 없어요. 저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거절했는데도, 여러 차례 찾아와 자꾸만, <교회 한 번 나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교수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아서, 자신도 모르게 평생을 숨겨온 가정사를 그에게 털어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저의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셨어요. 어릴 때 할아버지는 저를 무릎에 앉히시고는 기도를 해 주셨지요. 할아버지는 교회 장로였다는 이유로 평양에서 추방을 당해, 외딴 곳에 수용되었고, 갖은 핍박을 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마음 문을 열고 이야기를 한 후, 웬일인지 교회에 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회 문 앞에 당도하니,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내가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그때, 교회 안에서 찬송가의 선율이 들렸고, 순간 불안하던 마음이 평안해 지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날처럼 눈물 콧물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의 인생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32절) 그날의 예배가 저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정요한 집사는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어, 매주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현지 북한대사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북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온 그는 교회부터 찾았고, 찬양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순간, 자신도 바이올린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이올린 살만한 돈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겨우 십만 원을 준비해 악기점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에 즉석에서 이곡, 저곡을 연주해보고, 값을 물어보니 300만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이라, 바이올린을 내려놓고는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서 나오려는데, 그의 등 뒤에서, <저기, 잠간 만요!> 하는 소리에 돌아서 바라보니, 악기점 주인이, <이 바이올린 제가 선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 집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통해 악기점 주인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숙소로 돌아와 밤이 새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연주를 했습니다.

또 한 사람, 탈북자를 소개 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김예나 집사입니다. 그녀는 평양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습니다. 그날따라,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바쁘게 평양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여자가 치마를 입지 않고 바지를 입었다고 규찰반원(북한의 풍기단속반원)에게 걸려, 심하게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도 혹독하고 한심한 북한의 상황에, 더 이상 이곳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온 후, 이화여자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탈북자들의 기도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참석해서 탈북 해 온 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대한민국에서의 새로운 미래의 꿈을 꾸고 있던 어느 날, 새로운 탈북자 한 사람이 소개 되었습니다. 평양 음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바이올린 교수를 거쳐, 동유럽의 교환 교수로 재직하다가, 교회 다니는 것이 발각되어 대한민국을 찾아온 정요한 집사였습니다.

대학의 선, 후배가 되는 두 남녀가,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부부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믿음의 가정을 꾸리고, 탈북 한 형제자매들이 신앙 안에서 대한민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요한 집사는 말합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저는 김정일 음악단 단장과, 평양 음대 교수 등, 화려한 직함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이 모든 직함보다 귀하고 소중한 직함을 얻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계시는 교회의<집사>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껏 믿고 싶어서 탈북한 사람이다 보니, 저에게는 집사보다 더 귀한 직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저희 부부에게 주신 음악의 재능으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유투베에서 정요한, 김예나 클릭해 보세요)

오늘 소개드리는 김신철 아동은, 의식불명으로 장기 입원중인 아버지와, 가출로 연락이 두절된 어머니를 대신해서 고모의 손에서 자라온 아동입니다. 고모역시 장기간 아동을 양육할 수 있는 경제적 형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2019년 7월 시설 입소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 년짜리가 어린 나이에 연고지를 떠나, 낮선 시설에 입소하여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받았지만, 아동은 또래에 비해, 유난히 과묵하고, 어두운 표정의 첫 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설 입소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새 학년이 될 때에서야, 밝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 아빠 없이 살아온 탓인지, 정을 많이 그리워하고, 자신의 기분이나, 속마음 표현하는 것이 아직은 서투른 아동입니다. 또한 학습 면에서도, 기초가 부족하여 또래 아이들의 수준을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는 아동입니다. 신철 아동은 현재 경상북도에 위치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유지되려면 국민이 있어야 할 텐데, 도대체 자식 갖기를 꺼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노인은 많아지고,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단, 한 명이 너무나 귀합니다. 존경하는 교민 여러분, 20년이 넘도록 하루 같이, 불우한 아동들을 도와주신 후원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교민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1974년, 맨 손으로, 혼자 독일 땅을 밟았습니다. 그로부터 4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저는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열 식구가 되었습니다. 열 배로 불어난 셈입니다. 바라옵기는, 남한의 5천만과, 북한의 3천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통일을 이룩하고, 8천만 인구의 강한 대한민국이 되어, 함께 입을 모아, <필승 코레아>를 외칠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 봅니다. 교민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선교사 드림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32절>

2020년 6월 26일, 1176호 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