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속의 언어 – (6)

문학작품 속의 사건과 인물들은 세계 공통어가 되어 일상에서 다시 되살아난다

황만섭

로마는 미친 듯이 국토를 넓혀갔다. 카르타고와 제1차 포에니에 전쟁(BC 264-BC 241 23년)과 제2차 포에니에 전쟁(BC 218-BC 202, 한니발 장군과 20년)을 치루면서 로마는 비겁한 승리를 했고, 이집트를 공격해 카이사르(BC 100~BC 44)와 안토니우스가 번갈아 가면서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를 했다.

카이사르(50대)와 클레오파트라(20대)는 카이사론(아들)이라는 아들을 얻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둘과 딸 셀레네를 가졌다. 로마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을 손아귀에 넣었고, 그리스, 터키, 페르시아까지 국토를 넓혀갔다. 로마의 국토는 이스라엘, 독일, 루마니아까지 뻗쳤으며 지중해변에 속한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 해변가 모든 땅을 석권해 1000여 년 동안(BC 500~AD 500) 호령했다. 그야말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였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했던 로마도 종말에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태리 안에서도 갈기갈기 찢겨져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롬바르디아 등 여러 공화국으로 갈라졌다. 라틴어를 썼던 로마지방의 말은 피렌체 말에 밀려 이태리어에도 뽑히지 못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로마의 신세가 이렇게 초라하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달도 차면 기울고, 메뚜기도 여름철에만 한창일 뿐이며, 모기도 한 시절에만 번성한다.

갈리아지방(스페인)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는 명을 따르지 않고 강을 건넌 후,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던 어느 날 반대파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된다. 그는 총애하던 브루투스(BC 85~42)가 그들 속에 끼어 있는 걸 보고 “아! 브루투스 너마저”라며 신음했고 영웅 카이사르는 숨을 거둔다. 이제 반대파 대표가 단상에 올라가 “왜? 카이사르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역설했고, 대중들이 그의 연설에 호응하자,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안토니우스가 차근차근 그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반박해 나갔다. 연설을 듣던 대중들의 반응은 안토니오스의 응변에 열광했고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이에 놀란 반대파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뒤에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황제가 되었고 그가 그 유명한 아우구스트 대제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우스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고 그의 매제로 로마의 삼두정치를 이끌었지만, 후에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로마가 망하고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자, 지구는 피렌체(플로렌스)공화국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세상을 이끌어 갈만한 수많은 천재들이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피렌체 출신이었던 단테가 피렌체어로 신곡을 썼고 그 영향으로 라틴어(로마지방 언어)를 제치고 피렌체어가 이태리국어로 결정되었으며,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1475-1561)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두 사람이 피렌체 정부의 대회의장의 벽화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그림 경쟁이 이루어졌으며 결과는 미켈란젤로의 우세로 끝났다. 피렌체 사람들은 오페라를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문예부흥)운동도 그들이 일으켰다.

르네상스시대의 3대 천재화가는 미켈란젤로, 루벤스, 라파엘로라고 칭찬했으며,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로시니, 포스콜로, 젠틸레의 묘가 있고, 단테(가묘)의 가묘도 거기에 있다. 피렌체공화국 사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에 끌려가 활동했고, 그가 죽자 프랑스의 앙부아즈 성에 묻혔다.

조반니 보카치오(1313-75)는 데카메론(데카-10일, 메론-날)을 썼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1348년 일곱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페스트를 피해 피렌체 근처의 시골농가 언덕에서 열흘 동안 머물렀다. 그들은 매일 한 사람이 한 가지씩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고, 열흘 동안에 100개의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것을 보카치오가 데카메론(1350-1353)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썼다.

데카메론에는 사랑에 관한 음탕한 이야기들이 넘친다. 에로틱한 것부터 비극적인 것까지 없는 것이 없다. 보카치오가 등장시킨 인물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들의 이야기로 점잔만 빼고 뒤로 빠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탐욕, 새롭게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과 귀족간의 갈등, 여행하는 상인들의 위험과 모순, 속는 자와 속이는 자, 교황과 수도사들의 이야기, 순례자와 성자, 탐욕과 방탕아들의 이야기들이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의 사랑이야기와 사랑에 굶주린 기사들의 이야기, 도적들과 영웅들의 이야기, 어리석은 자와 왕들의 이야기도 그 안에 들어 있다. 통속적인 이탈리아 이야기와 프랑스의 파블리오, 동양의 동화들을 모아 보카치오는 천일야화를 썼다. 데카메론이 나오자, 그동안 눈치만 보면서 망설이며 금기시 했던 성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설가들은 이제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보카치오에게서 용기를 얻은 소설가들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쉬지 않고 열정적인 사랑이야기를 거침없이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비석의 ‘호박꽃 피는 밤’과 ‘벌레 먹은 장미’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세대 마광수 교수(1951-2017)의 ‘즐거운 사라’가 나오자, 세상은 시끄러워졌고 그 소설은 폭탄을 맞고 말았다.

혹자는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갔다”고 아까워했고, 혹자는 윤리와 도덕을 파괴한 자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마 교수는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고 한스럽다”며 울부짖었다. 그는 강의 중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감옥에 들어갔으며 그의 책은 서점에서 사라졌다.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가 목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5800원 하던 책 ‘즐거운 사라’는 2만원에서 5만원까지 치솟았다. 추도사에서 “시대를 잘못만난 천재 소설가시여! 잘 가시오. 잘 가시오”를 절규했고, “시대를 앞서간 천제 소설가는 사라처럼 사라졌다”고 슬퍼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수석이었고, 졸업할 때까지 내내 A학점을 받는 장학생이었다. 28세에 홍익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32세 때부터는 연세대학교수로 2016년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시집 11권, 문학이론서 8권, 비평 9권, 철학적 에세이 9권, 에세이 13권, 아포리즘 4권, 소설을 38권이나 썼고, 전시회도 19회나 가졌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중동의 이슬람국가에서만 포르노그래피가 불법이고,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와 북미와 남미의 많은 나라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매춘이 합법이다. 독일서점 어디라도 야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합법 속에서 살고 있다. 마 교수는 “내 재판은 10년 후에는 있을 수 없는 해프닝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항변했고, 당시 재판장도 “이 판결이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 교수는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 섞인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그런 일이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이다”며 울었다.

*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2020년 7월 24일, 1180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