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여행 2019년 9월19일 ~ 24일 한국에서여행 9월 24일 ~ 10월20일 (6)

황만섭

목포에서 국도 1호선(목포-신의주)과 2호선(목포-부산)의 출발점인 도로원표를 보는 기쁨은 크다.

목포에는 근대역사관을 비롯하여 김대중 노벨 평화상기념관, 자연사박물관, 어린이바다 과학관, 조각공원, 갓 바위 등이 있다. 일제시대 때에 일본인들이 살았던 주택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목포다.

삼학도가 대 삼학도, 중 삼학도, 소 삼학도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고,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로 잘 알려지기도 했지만, 평소에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정도로 사랑 받던 우리나라 3대 항구 중 하나였다. 오랜 세월 무관심 속에서 밀려났다가 이제 다시 희망의 항구도시로 재도약하고 있는 곳이다.

얼마 전 손혜원 의원의 부동산 매입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곳이 목포의 어디쯤인가 궁금해 찾아보았더니 너무나 허술했다. “아니 이게 뭐야? 공짜로 주어도 안 갖겠다”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허술하게 버려진 건물과 땅을 소중한 우리의 역사라는 걸 알고 찾아낸 손의원의 역사인식과 안목이 놀랍다.

목포관광 다음날, 우린 서울시티투어를 하기로 했다. 청계천광장 맞은편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로 덕수궁, 남대문시장, 서울역, 전쟁기념관, 용산 역, 국립중앙박물관, 이태원, 남산전망대, 명동, 남산골 한옥마을, 신라호텔, 하얏트 호텔, 동대문시장, 대학로, 창경궁, 인사동, 북촌, 조계사, 청와대 앞,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순으로 도는 코스로 18.000원이었다.

원하는 곳 아무데서나 내려 구경하다가 다시 탈 수도 있는 1일 티켓으로 맨 먼저 승차를 하다 보니 우리 좌석이 맨 앞자리가 되었고, 보는 시야가 넓고 훤했다. 우리는 연속해서 한 바퀴 더 돌았고, 자연스레 서울시내의 윤곽이 확실하게 잡혔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서울시내가이드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 불렀고, 일본인들은 창경궁에다가 동물들을 키우게 해 창경원이라 부르게 해 우리나라의 왕궁을 동물원으로 전락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남산은 서울에 있는 작은 산이다. 남산의 절반은 둘레길을 만들었고, 다른 절반은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만들어 남산을 올라가도록 했다. 그밖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과 계단을 통해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작은 산인데도 볼거리와 소일거리가 많다.

남산을 보면서 명동의 골목길을 걸어가면 손님들이 줄을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유명한 명동교자 앞을 지난다. 한참을 더 올라가면 남산케이블카가 나오고, 그걸 타고 올라가던가, 아니면 그곳을 지나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남산둘레길이 시작된다. 둘레길은 아름답고 걷기 편한 산책길이다. 난 서울에 갈 때마다 둘레길 걷기를 좋아한다.

둘레길을 택하지 않고 조금 더 오른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도서관이 나오고, 그 옆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바로 잘 갖추어진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을 본 다음 걸어서 남산을 올라갈 수 있다. 만약 케이블카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면 곳곳의 샛길에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기념비와, 제갈량, 단군성전, 와룡문, 석호정 활터 독립선언문 등 여러 유적과 기념비 등을 볼 수 있다.

케이블카가 있는 곳에서 시작된 둘레길은 남산을 절반쯤 돌아 동국대학교와 신라호텔이 있는 곳에서 멈춘다. 남산의 둘레 길만 좋은 줄 알았더니, 남산으로 올라가는 찻길 또한 환상적이다. 이렇게 깨끗하게 손질이 잘된 도로와 숲 그리고 맑은 공기,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소나무들과 가지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각양각색의 단풍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풍경에 탄성이 나온다. 세상 어디에 또 이런 경치가 있을까 싶었다. 남산 길은 꿈길이었다.

오늘은 친구들 몇 가족과 함께 단체여행(10월12일~13일)에 합류하기로 했다. 일행은 40명쯤 되어 보였다. 서울시내 몇 곳을 차례로 돌며 손님들을 모으더니 영암을 향해 떠났다.

첫 목적지는 월출산으로 이동 중 버스 안에서 아침식사를 배식하는데 솜씨가 민첩하다. 먼저 비닐을 씌운 받침대를 나누어주었다. 그 다음 밥과 반찬을 주었고 식사가 끝나자, 비닐을 걷어 가니 바로 설거지가 끝났다.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휴게소가 나오자 휴식시간을 준 다음 느린 속도로 답답하게 달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확하게 점심시간에 맞추어 영암읍 식당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점심 후 영암 쪽의 월출 산은 경사가 심하다며, 경사가 완만한 강진 쪽을 통해 올라가자고 했다. 목적지 인 경포대까지 걸어 올라간 사람과 중간에서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각자의 건강을 감안해 자연스럽게 벌어진 현상이다. 일정도 타이트하지만, 일행들의 나이도 가지각색이었기 때문이다. 월출산의 경포대는 강릉에 있는 경포대를 누군가 월출산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월출 산에도 또 하나의 경포대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나주다. 나주에서의 관광은 ‘빛 가람 전망대’와 산림자연연구소 등 두 곳을 구경한다고 했다. 나주혁신도시의 랜드마크로 등장하는 전망대는 조그마한 동산 같은 언덕에 있었지만 동서남북이 훤하게 잘 보이는 명소임이 분명했다. 혁신도시의 위용을 보고 감상하기에 딱 좋았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갔다가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오던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도 있는 시설이다.

다음으로 구경할 곳은 산림연구소였는데 그곳에는 집사람의 동창 두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완도 신지면에서 온 친구이고, 한 사람은 광주에 살고 있는 친구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동창을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들떠있었다. 40년 만에 만나는 세 사람의 기쁨은 옆에 보는 사람까지도 덩달아 반가웠다.

친구들은 “저녁식사를 같이하고, 밤 늦게 호텔로 오겠다”며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 이미 방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아마 40년 이상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이번 기회에 다하고 갈 태세였다. 동창을 만난 집사람은 남편과 여행을 같이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지 친구들과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급기야 어디론가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5~60년 전에는 깔깔거리며 재잘거리던 꿈 많았던 시절의 ‘완도 여학생들’을 상상해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했다.

나주산림연구소는 울창한 숲과 팔각전망대, 종합놀이대, 치유숲길 등이 잘 어우러져 있는 청정지역이었고, 특히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쭉쭉 뻗은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전주와 나주를 합해서 전라도라고 불렀고, 옛날의 나주는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나주목사의 권세는 엄청났다. 금성관(지방궁궐)은 중앙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매월1일과 15일에는 한양을 향해 충성을 다짐했던 장소라고 했다.

정수루는 나주관아의 정문이었고, 2충에 있는 북은 시간을 알릴 때와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때 사용했으며, ‘금학원’은 천하 명당자리로, 나주목사가 살았던 ‘내아’가 있던 곳이다. 동학혁명 때 전주확약으로 정부군과 동학군이 맺은 협약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나주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전봉준 장군이 단신으로 들어가 담판을 벌렸던 곳이기도 하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1186호 22면, 2020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