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과 구경꾼

류 현옥

한 그림 앞에 섰다. 승객을 가득 싣고 침몰하는 여객선을 그린 수채화, 검은 구름으로 덮인 성난 하늘은 굵은 빗방울을 강풍에 담아 내려퍼붓고 노도의 해면에는 나무입새 하나같은 배 한 척, 침몰하는 배에서 죽지 않고자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실은 배, 선체의 반은 이미 물속으로 잠겼다.

해변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있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또 다른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모두 난파선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만 그렸다.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물속으로 사라지기 전의 사투하는 인간의 마지막 순간들이 전율로 느껴진다. 대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이다. 나는 하나의 작품으로 간격을 두지 못한 채,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아우성치는 인간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등만 보이는 구경꾼들은 안전지대에서 물 건너 먼 산의 산불을 보듯 서로 어깨를 붙이고 있다.

거실에 앉아 TV 드라마를 보는 관객의 기분과는 다른 상황이다. 알 수 없는 불안이 겹쳐 들어온다. 거리를 두고 보아지지 않는다. 파국적인 인간사의 한 장면이기에 그림속의 불행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불상사와 연결하게 된다.

현실사회에서는 어떤가? 대문 밖을 나서면 보호받던 집 안과는 다른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쓰러진다,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는 어린아이가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다, 모퉁이에서 나오던 자동차가 직선 도로를 달리던 차와 부딪친다. 현실의 광장 속으로 들어간다. 사고 장소에 모여드는 구경꾼들은 핸드폰을 내어 즉석 사진을 찍는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사진으로 담는 구경꾼의 마음은 어떠할까?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두고 나름대로 인간심리를 대한 나름의 학설을 발표했다. 나와 남과의 거리, 부모형제 사이에도 간격이 있고 부부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人間)의 間은 ‘사이 간’이다. 추측에 의해 믿음이나 도덕적인 측면에서 설마 하는 일들 중에 이 거리감이라는 것이 서로를 보호하기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남을 살리기 위해 물속으로 혹은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영웅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되기도 한다.

얼마 전 한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가 여러 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부모의 아픈 마음에 대한 것에서 시작한다. 반세기전 김포공항에서 손을 흔드시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얼마 후에 돌아가셨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모습은 경우에 따라 감정의 강도를 달리하며 집요하게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고 했다. 머릿속에 담고 살아가는 그림, 고향에 남은 가슴 아픈 기억이 딸을 멀리 보내면서 더 강하게 되살아났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함께 고향을 떠나 노동이민을 온 동료들이기에 우리는 시련의 동지들이다.

어떤 이야기, 어떤 말을 해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

“어머니가 우시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습니까?”

“어머니는 내가 돈을 벌어 빚을 갚게 될 것만 생각하는 것 같았지요.”

“딸을 마지막 본다고 생각했다면 그러진 않았을 것인데…”

그녀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는 딸을 안고 울었다고 한다. 남편이 보험금을 해지하여 유학비를 마련했고 딸에게 주어 보냈단다.

“정말 좋은 세상이지요! 내가 독일로 떠날 때는 집안 사정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떠났지만, 구태여 캐나다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떠나는 딸을 말릴 수가 없어 돈뭉치를 손에 쥐어서 보낸 겁니다.”

고국을 떠나온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눈물 흘리던 부모형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구경꾼이 되었던 건 아닐까? 정든 땅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반생을 어떻게 지낼 것이라는 것을 전연 모른 채,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예감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방의 나그넷길에 선 딸을 붙잡지 않고 떠나보낸 것이다.

그날로 중단된 어머니의 사랑에 목이 메었고, 갈구하며 사는 동안 어머니 없는 세상에서 낳아 키운 딸이 그녀 곁을 떠나는 날이 되어 그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했다. 붙잡아 주지 않고 떠나가게 둔 어머니를 얼마나 자주 원망했던가.

해변에 서서 침몰해가는 여객선을 구경하는 인간의 내면을 산문으로 표현한 글 속에는 인간의 잔인함을 쓰고 있다. 구경꾼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그들의 내면적인 동요를 설명하는 글을 읽은 후 두 눈을 감았다. 그림은 더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우선 구경꾼들은 호기심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가에 서서 지켜본다고 추정한다. 구경꾼들이 선 해변의 든든한 땅은 안전지대이고 위험성이 없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사투의 드라마를 보는 구경꾼들은 남의 불행을 보며 인생의 모험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행운을 재확인한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파도와는 달리 발아래의 든든한 땅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뭐 하러 겁도 없이 배를 타고 나가 저 변을 당하는가?” 비난어린 한마디를 뱉기도 한다.

동정과 비난이 교체하는 마음속의 변화를 억제하며 상황 판단을 하려 애써본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에 어선을 타고 풍랑이 일고 있는 대해로 떠났다가 당하는 변일 수도 있고 집을 떠난 지 몇 년 만에 귀향하는 아들일 수도 있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쳐서 단 한사람이라고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라고 자기보호, 정당화를 하면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1190호 14면, 2020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