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묻어나는 추억들

손병원

가을이 짙어간다. 한 해를 열심히 산 수목들은 내년을 맞기 위해 온갖 빛깔로 치장하다가 몸을 떨군다. 가을은 봄 여름을 안고 살다가 들녘을 살찌워 만물에 풍요를 안겨준다. 겨울을 대비해 몸을 비웠다가 새로운 봄 여름을 키울 준비를 한다. 사람들 또한 한 해를 갈무리한다. 거기에는 한 줄기 추억으로 남게 되는 연륜이 더 해만 간다.

1962년 KBS 2 라디오가 개국되면서 본격적으로 팝송이 소개되고 방송을 탔다. 빌보드 차트를 기준으로 최신 팝송을 선별하여 프로를 진행했던 최동욱은 1964년 동아 방송으로 옮겨 탑툰 쇼, 3 시의 다이얼을 통해 한가한 방송 시간대를 황금 알로 바꾸며 젊은이들에게 팝송을 친숙하게 이끌었다.

당시 라디오 방송 시그널을 보면 동아 방송: 3시의 다이얼에는 “That happy feeling”, 영시의 다이얼에는 “In the year 2525”, 꿈과 음악 사이에는 “The lonely sheperd”, 밤의 플렛 홈에는 “Isadora”, 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는 “Merci cherie”, 한밤의 음악편지에는 “Adoro”, 박인희와 함께에는 “Adelaide”, 2시의 데이트에는 “Emmanuelle” 이며 동양방송: 밤의 데이트에는 “Music box dancer”,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La reine de saba”, 밤 하늘의 멜로디에는 “Mister lonely”, 이브의 연가에는 “Lonely”, “Amore grande amore ribero” 등이다.

여성 진행자가 정겹고 가슴 시린 목소리로 청취자들의 음악엽서를 나긋나긋 읽어주면 그 사연들은 한장 한장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분위기를 낙엽 밟는 연인들로 몰아갔다. 6070 당시 활약했던 라디오 DJ들은 은퇴, 타계하였으나 최동욱은 자비로 인터넷 라디오방송 < 라디오서울코리아>를 열어 85세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건전한 팝송 전도사 역할을 다한다. 스마트 폰으로 방송청취가 가능하다.

나는 60, 70년대의 팝송 샹송 칸소네를 엄청 좋아하다 보니 노래에 대한 배경과 가수의 면모를 알게 됐다.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면 주제가가 끝나지 전까지 영화의 줄거리 배우들을 연기를 주마등처럼 꿰찬다. 팝송은 Popular song의 줄인 말로서 영어권의 대중가요를 뜻한다.

음악은 소리를 듣는 즐거움이란 단어이다. 금성 Gold star 트랜지스터 라디오 뒷면에 검은 뚝 고무줄로 로켓트 표 건전지를 탱탱 감으면 목침 만 해진다. 배터리 아낀다고 항상 볼륨을 낮춰 들었다. 방송이 나오면 카세트 공 테이프로 녹음해 두었으나 오래 자주 들으면 테이프가 늘어졌다. 밤거리에 카바이트 등 켜고 리어카에서 판매하는 테이프는 질이 좋지 않았다.

노랫말은 소리 나는 대로 적어놓고 따라 불렀으니 완전히 콩글리쉬라 영어 공부에 도움이 안됐다. 나중에 세광 출판사에서 나오는 노래 묶음 책으로 대치하여 한결 편했다. 버스 기다릴 때 동네 레코드 판매점이나 전축 라디오 수리 점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다음 버스를 탄다. 숙박비가 부족하거나 아끼기 위해 심야다방에서 커피한잔 시키고 첫 기차를 기다리며 노래듣기에 빠져든다. 팔각 성냥통의 성냥들로 탑을 쌓으며 무료를 달래다가 심통이 나면 잘게 잘게 부수거나 문질러 놓는다.

공부할 때에는 항상 팝송을 틀었는데 이는 노래가 주위의 잡음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이다. 집중이 잘된다. 주관적 견해일수 있겠으나 습관 또한 무섭다. 노래 들으며 삼양 쇠고기 라면 생으로 까먹으면서 공부하다 잠들고 깨어나면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왔다. 두터운 광목 솜이불 속에서도 즐겨 들었던 알토란 같던 노래들이었다. 새벽녘 변소 오 갈 때 밤하늘을 보면 별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천사의 모습으로 눈이 내리는 날 즐겨 하는 노래가 나오면 몸과 마음이 상큼해진다. 음악의 힘이다. 예전에는 춥고 배고팠어도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 청소년들은 기계로 산다. 그 부풀던 시절 감성으로 듣던 노래들이 이제 은발의 세월에서 추억으로 만난다.

60,70년대의 영화 음악은 감성적 감동적 순수함이 좋았는데 이 또한 세월 따라 변하니 어쩔 수 없다. 요즘은 흥겨움 위주로 춤까지 추며 노래하니 자연 노랫가락이 빨라지고 높아져 흔드는 것 밖에 안 보인다. 노랫말 듣기는 영 글렀다. 허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투브 조회 1억을 최초로 넘기는 것을 보고 머쓱해졌다. 나도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데 항차 외국인들이야 오죽하랴마는 우스꽝스러우나 신명 난 춤 바람에 홀딱 한 게 아닐까 싶다. 노래가 아니고 흥이다. 방탄소년단은 한국가수 최초로 빌보드 차드 1위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어로 불렀지만 오른 게 장하다.

모진 말 잘하는 스피노자는 이런 말도 했다. 같은 사물이 동시에 선이 되고 악도 되며 그 어느 것도 어느 경우가 있다.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선이고 상중의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고 귀머거리에게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공자가 제 나라에서 소악을 듣고 배움에 빠져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고 한 말 “음악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극진함을 미처 몰랐도다.”

좋은 음악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내면에서 끈적거리는 고향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같이 노래 부르던 동무 생각이 자연 따라온다. 고향은 향수 덩어리이다. 음악은 추억을 곧장 불러 세운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추억은 그 때의 시절에 가 닿는다. 창문 스치는 밤바람에도 추억이 솟을 만하다. 추억은 지난날의 되새김질이다.

추억은 그리움이 더 많다. 그 그리움은 내 청춘의 그리움이 더 진하다. 추억은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애절하다. 추억은 지난날의 나이테이다. 즐거운 추억으로 힘을 얻고 안타까운 추억은 다음의 실수를 막아준다. 즐거웠던 추억은 오래 남고 쓰라린 추억은 더 오래 남는다. 눈물로 빚은 술이 그리움을 몰고 오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과거이고 미래에 관해서는 죽음이다. 설령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미래는 남아있으니 인내와 용기만 있으면 된다. 노인이 되었다고 과거에 빠지지 말고 젊었을 때처럼 앞날로 향해 나가야 한다. 이는 장성한 자식들에게도 은밀한 영향을 끼친다. 좋은 게 좋다.

한때 문화방송의 효자프로 가요반세기가 있었다. 제작된 음반이 성황리 시중에 판매되었는데 그 전집을 형님 집에서 고스란히 다 들었다. 노래에 얽힌 사연과 함께 노래 정보가 해설 책으로 딸려있었다. 자주 듣고 읽다 보니 가요사의 변천과정도 절로 공부하게 되었다.

대중가요의 특성은 시대의 애환을 담았다. 노랫가락에서 그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가요연구사가 가요에 나오는 낱말 빈도수를 통계로 잡아 발표했는데 사랑이 단연 최고였다. 남녀간의 사랑일진데 높은 데서 떨어지는 것보다 사랑에 빠지면 더 위험한 게 또한 사랑이다. 결혼하여 아이를 키워봐야 부모님의 은혜를 알 수 있듯이 헤어진 사랑도 삶의 성숙 과정에 속하는 것이기에 크게 서운해할 건 아니다. 첫 사랑은 그 순수한 열정 때문에 가슴앓이 할 수 는 있으되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인성은 미성숙한데 사랑이 덮치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겁다. 그리하여 첫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하얀 도화지 같은 여린 마음에 사랑이 처음 그려진 기억이기에 오래 남는다.

기분이 뭉쳤을 때 음악으로 달래보라. 물은 기울어 지지 않고 수평이듯 내 마음을 수평으로 잔잔히 이끌어 오는 게 음악이다. 바다 호수 대 자연의 풍광을 바라 보거나 미술품을 관람하는 것도 멋진 안정감이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데는 음악이다. 음악은 혼자서도 즐겁고 함께 즐겨도 새로움이 있다. 음악은 추억과 함께 돌아 마음을 챙겨준다. 벌레 한 마리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무수한 신을 만들었으되 그 어느 신이 음악을 울렸다는 적은 없다. 음악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들의 위대한 창조예술이다. 이 땅과 하늘은 어디에서 하나가 된다.

2020년 한가위를 보내면서.

2020년 10월 16일, 1191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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