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믿음

강정희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50년을 맞이한 골동품 부부다. 30년의 파란곡절이 많은 세월을 살면 가슴에 진주 하나씩 만들어 간다는데 난 작은 진주를 두 개나 만든 셈이다. 잘 버텨줘서 고맙고 잘 이겨내 줘서 고마운 세월이다.

20kg 가방 하나 달랑 가지고 이역만리 독일에 와서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렀고 41년의 고된 수술실간호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으니 그동안 질기게 살아온 인생, 푸르게 살아나는 추억들이 얼마나 많으랴? 주머니 속 구슬처럼 소중했던 그 추억들은 언제나 생각 속의 보석이다. 뿌리를 뽑아 국경을 넘어 다른 땅에 다시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은 쉬운 결심이 아니었다.

일평생 한 번인 금혼식이니 단둘이 여행이라도 떠나려고 했지만, 이 공이 공 (2020) 년 초에 이 발음이 너무도 좋아 올해는 무한한 행복이 있을 거라 희망을 품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일 년이 가깝게 코로나가 우리들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 꼼짝없이 묶여서 집에서 조촐하게 보냈다.

돌이켜보면, 상당히 긴 50년의 결혼생활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타향에서 오로지 가족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며 푯대를 향해 경황없이 살면서 우리 아이들의 동선을 처음부터 함께한 그 세월은 내게는 그리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유치원 시절에서부터 대학 과정을 마치고 야무진 푸른 꿈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사회에 첫발을 딛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적응하는 과정,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냉정히 견디며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지런한 눈물방울이 맺힌, 모든 것이 잘되기를 염원하는 가슴 조인 그 시간이 곧 흘러간 50년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 일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간호사라는 직업을 빼고 내 인생을 말할 수 없다. 간호사를 중심축으로 평생의 삶이 이루어졌다. 간호사로 친구를 사귀고, 간호사로 일하고, 간호사로서의 사명감으로 봉사 헌신하며 밥그릇을 채웠다. 한번 간호사이면 영원히 간호사다!

내가 정년퇴직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고하며 가끔은 만나서 옛이야기를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자리였지만, 돌아보면 추억 아닌 게 없고 용기와 기를 심어주며 똘똘 뭉쳐 서로 믿고 세워주며 보호해 주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팀이었고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동료였다고들 한다.

우리의 가정생활에서도 다름이 없다. 남편을 믿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것과 믿어주는 것이었다.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신앙의 절대적인 믿음과 고백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좋은 인을 만들고 좋은 연을 만나서 순금 같은 믿음을 선물하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중요한 요인이다. 사람은 믿어주는 만큼 신명 나게 잘하고 아껴주는 만큼 여물고 인정해 주는 만큼 성장한다고 한다.

이젠 노안이든 병이든 친구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고 즐거운 일도 많지 않은 우리 나이에 둥지를 떠난 자식들의 좋은 소식은 남다르다. 두 아들이 원만하게 가정과 직장 생활을 잘해 나가고 있음도 기쁨이고 행복이다. 가끔 HALLO OMA! 하며 걸려오는 꽃신처럼 예쁜 손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누는 것도, 똘똘 차돌같이 야무진 두 손자가 건강히 잘 자라가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표를 보는 순간 저절로 엔도르핀이 생성되고 활짝 핀 기쁨으로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48년 전 우리 큰아들이 탄생했을 때 내가 근무했던 일자리에서는 드디어 유망한 한국 남자 간호사가 탄생했다며 축하의 인사를 수없이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난

“아니요! 남자 간호사라니요? 어디 지켜봅시다!”라며 나만의 미소를 지으며 혼자 꽁알거렸다.

자식을 어디 부모 마음대로 하려 마는 늘 목걸이처럼 열쇠고리를 목에 걸고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던 다부진 아이 어른, 우리 아들은 10살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진로를 정했었다. 늘 가정과 병원을 연결하며 살았던 엄마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 집은 온 가족이 오순도순 함께하는, 피곤해도 가장 즐겁고 빛난 저녁 식사 시간에는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서둘러 저녁을 준비할 때면 아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작은 눈망울을 굴리며 오늘 메뉴가 무엇이냐고 냄비 뚜껑을 자주 열어 보면서 입맛을 다시던 기억이 지금도 토실토실 생생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해 종일 떨어져 지내다가 만난 엄마를 보러 부엌엘 자주 들어와서 내 앞치마에 감길 때마다 한참이고 순하게 등을 다독거리며 뜨거워진 내 눈시울을 식혔었다.

저녁을 맛나게 먹고 난 후에 남편이 맨 먼저 시작하여 아이들까지 그날 체험했던 이야기나 하고 싶은 말을 서로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 시간은 하루의 고달픔을 내려놓고 따뜻한 눈빛을 맞추며 사랑의 속삭임과 이해의 만남, 가족을 향한 서로의 애정 관심이었다.

그럴 때마다 난 수술실에서 나와 가장 접촉이 많았던 병원 원장이신 Professor Becker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상대방의 직책과 상관없이 한결같은 그의 친절함과 거짓 없는 몸짓, 옳은 것을 사랑하고 바른 것을 사랑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그의 모양새는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라고 그의 덕망을 높이 평가했었다. 가끔 우리 아이들을 만나는 날은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하고 반갑게 말을 걸기도 하셨다.

어쩜 아들의 어린 마음에 본보기로 자리매김한 교수님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 않았나? 싶다. 어린 날의 다부진 그 각오가 변하지 않은 아들은 의대를 지망하여 의사가 되었다. 난 오랜 직장 생활에서 간호사는 물론이고 많은 의사를 만났다. 변명이 먼저인 세상에서 그들의 인품은 놀랍도록 각각 달랐다.

난, 제아무리 수술을 잘하고 유능한 의사라도 인성이 갖춰지지 않은 의사는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의사이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의사 앞에 환자는 언제나 슬프다. 치료의 반은 믿음이기에 문지방을 낮추고 아무리 힘들어도 오로지 환자를 위하여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를 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건 마음이 만든 표정이며 웃음 속에 가난 없고 웃음 속에 우환 없다고 아름다운 생기를 발라 환자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으로 동그란 미소 짓는 얼굴을 보여야 한다는 내 얘기가 마음의 소리 되어 남다른 책임감과 자존심을 가지고 날개를 파닥이며 활어처럼 도전하며 좋은 의사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41년을 정형외과, 구급 외과에서 근무한 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문 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정형외과와 구급 외과를 택했던 것 같다.

베를린에 사는 우리 큰아들은 1년 전부터 PRAXIS 차릴 계획을 했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함께할 동료를 찾아서 자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며 우리에게 의사(意思)를 물었을 때, 우리 부부는 아들의 결정을 100% 지지했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이고 평생을 좌우하는 그 선택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네가 얼마나 심중하게 다뤄 결단을 내렸겠느냐며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드디어 며칠 전에 20년의 병원 직장 생활을 마쳤다. 최근에 일했던 곳은 만 10년을 오랜 식구처럼 편안하게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티 없이 맑은 정성과 온 열정을 쏟아 부은 곳이어서 떠나가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직원들의 아쉬움이 무척이나 컸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 사람인데 떠난다고 하니 앓은 이 빠진 것처럼 속이 다 후련하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얼마나 행복한 이별인가?

그곳에서 두 개의 전문의사 자격증 (정형외과, 구급 외과)을 땄고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천한 곳이니 오죽이나 의미 있고 애착이 있었던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희한한 왕관을 쓰고 혼자는 안 간다고 억지를 쓰며 버티고 있는 코로나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이별식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병원 카페테리아에 음식을 주문하여 지금껏 함께 일했던 여러 분야에 감사의 돌림편지와 함께 전달한 감격의 잔치였다고 한다.

담당 의사로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직접 찾아가 인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ALLES GUTE! VIEL GLÜCK!”라는 듣기 좋고 짜릿한 이 간결한 말을 온종일 가는 곳마다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가 위안을 받는 것은 비록 PRAXIS를 차려 떠나지만, 어쩌면! 일주일에 하루를 그 병원에 와서 수술하게 되니 천만다행이라는 것이다. 거의 20년을 수술하며 여문 두 손끝을 계속 환자를 위하여 쓰고 싶은, 비대하지 않은 그 희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아직은 실내 장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 보내온 사진으로 본 눈설지 않은 대문짝만한 청색 간판을 보는 내 가슴이 벅차게 출렁인다.

ORTHOPÄDIE

KREUZBERG

GANZHEITLICHE ORTHOPÄDIE

OSTERPATHIE

UNFALLCHIRURGIE

BLÜCHERSTRASSE 27, 10961 BERLIN

드물고 귀한 인연으로 세 전문의사가 아름다운 마음을 함께 모아, 오는 12월에 개업하는 PRAXIS가 경쟁 아닌 팀워크로 부끄러운 게으름 없이 새벽 날개 치면서 역경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어울림으로 즐겁고 산뜻하게 출발하는 이들을 두루두루 축하한다. 순풍에 돛을 달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름다운 믿음은 별빛처럼 영롱한 환희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라는 삶의 양태로 나란히 가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1194호 16-17면, 2020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