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11월과
우리가 몰랐던 마리아 퀴리 이야기

 

남종석(폴란드 한인회장)

 

11월은 폴란드인들에게 의미가 많은 달이다.

1795년 11월25일은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에 의해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날이고, 123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11월11일 폴란드가 독립국가로 유럽역사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퀴리부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마리아 스쿼도프스카(Maria Salomea Skłodowska)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인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가족 모두가 불행을 겪었다. 당시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교사였던 마리아의 아버지는 금지된 폴란드어로 쓴 학생의 답을 정답으로 처리했다는 이유로 교사직을 박탈당하고 이후 사업에 실패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대단히 잘 했지만 그 당시 바르샤바 대학교는 여학생의 입학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로의 유학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으다가 23세가 되어서야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시절에 마리아는 가정교사로 일하던 부잣집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한 집안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남자 집안의 반대로 결국 헤어졌다. 만약 이때 결혼에 성공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퀴리 부인’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리아의 10대 시절에 있었던 일로 한국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러시아는 폴란드의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를 배우게 했다.

어느 날 러시아 장학사가 마리아의 학교를 불시에 방문해서 평소 성적이 좋다는 마리아에게 러시아의 위인들에 대해 질문하자, 마리아는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폴란드인으로서 커다란 모멸감을 느끼고 장학사가 자리를 뜨자 담임선생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다.

마리아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당시 35세의 노총각이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 이듬해인 1895년에 목사도 없이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뒤 자전거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아는 부부 이전에 가장 아름다운 동료였고, 가장 힘이 되는 친구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입버릇처럼 “내가 여성으로서 노벨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은 피에르가 내 곁에 있었기 때문 이다”라며 돈독한 부부애를 자랑할 정도였고 서로를 신임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radium)과 폴로늄을 발견하게 된다. 폴로늄(polonium)이라 이름은 당시에 독립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던 곤경에 빠진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가 명명한 것이다. 방사능( radioactivity)라는 용어도 마리아 퀴리가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업적으로 두 사람은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원래 마리아는 노벨상을 받지 못할 예정이었으나, 남편인 피에르가 마리아와 더불어 공동 수상하게 해달라고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 까닭에 부부 공동수상이 가능했다. 이로써 여성으로 최초의 노벨수상자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라듐은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자연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성숙한가요? ”
-마리아 퀴리-, 노벨상 수상식 연설

 

그러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1906년 4월 19일, 피에르가 마차에 깔리는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피에르가 죽은 이후 소르본 대학교에서는 고심 끝에 피에르의 후임으로 마리아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이렇게 해서 마리아는 프랑스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남편이 죽은 몇 년후 남편의 제자인 유부남 교수와의 스캔들로 프랑스 과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동료 과학자 폴 랑주뱅은 남편인 피에르퀴리의 연구를 돕던 제자로 아인슈타인도 인정하는 프랑스 최고의 물리학자중 한 사람이었다.

“친애하는 폴, 어제는 당신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보냈어요. 지금도 당신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립니다. 당신 존재의 모든 감미로움을 다시 발견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마리아 퀴리가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 일부 발췌-

 

이때가 마침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할 무렵이었는데 화학상 수상자로 내정된 퀴리 부인에 대한 소문이 들리자 위원회는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에게 진상을 문의했다. 대사는 오보라고 알렸고, 위원회는 마리나를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마리아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당당하게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마리아가 화학상을 타면서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

연이은 노벨상 수상으로 마리아의 이름이 높아졌지만 이민자 출신이고, 여자인 마리아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후보가 되지만 결국 떨어지게 된다. 보수적이고 남성권위적인 프랑스과학 아카데미는 여성 회원 가입 금지조치를 1962년까지 유지한다.

마리아 퀴리와 폴 랑주뱅은 결국 결합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나, 마리아의 손녀딸과 폴 랑주뱅의 손자가 결혼하는 소설 같은 두 집안의 인연은 계속된다.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마리아는 스스로 개발한 ‘리틀 퀴리’라는 자동차로 전선을 누비게 된다. 이 차에는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어 부상병들을 진단하는 데 큰 활약을 했다. 이때 마리아에게 도움을 받은 부상병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훗날에 밝혀진 바로는 이때 마리아가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된 것이 사망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조국 폴란드는 123년 만에 독립을 되찾았고, 마리아는 연구소로 돌아가지만 연구소에는 라듐이 1g밖에 없어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행히 미국의 도움으로 라듐을 구할 수 있었다. 라듐에 대해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지 않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리아는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기회를 인류를 위해 포기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마리아는 계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건강이 악화되어 방사선 피폭에 의한 악성 빈혈 등으로 몹시 고생하며 요양원을 전전하다가,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로 사망하였다.

1925년 독립된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기도 하였으나, 마리아가 죽은 후 5년 후에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폴란드는 다시 유럽의 전쟁터로 변하게 된다.

1995년 4월 20일 피에르 퀴리와 마리아 퀴리는 팡테옹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팡테옹에는 프랑스의 영웅과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이곳에 안장된 여성이다.

11월의 폴란드날씨는 잦은 비와 점점 짧아지는 낮시간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폴란드의 역사 속에서 11월은 희비가 엇갈리지만, 사라진 조국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고, 이민자의 차별, 여성으로의 성차별 속에서 위대한 업적을 낸 마리아 퀴리의 탄생일(11월 7일)에 많은 폴란드인들이 마리아의 생가(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중이다)를 방문하여 그녀가 폴란드인임을 자랑스러워한다.

바르샤바에 있는 마리아 퀴리 생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중이다.

나라를 잃은123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도 폴란드어를 유지하고, 정체성을 지켜 온 폴란드의 근성과 자존심은 충분히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폴란드에는 많은 한국 대기업들과 교민들이 활발하게 투자를 하면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두 나라의 탄탄한 경제교류를 바탕으로 양국 간에 더 많은 문화교류와 젊은 차세대들 사이 교류를 통해 폴란드와 한국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적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

 

1196호 14-15면, 2020년 1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