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한인문화예술협회주최, 문학창작마당 수필 공모 금상 수상작

옛날 옛날에

서 한 수

고국에서 산 것 만큼이나 해외 생활이 오래되어 간다. 공부니 결혼이니 직장이니 하는 이유로 여러 타국을 거쳐 살면서, 명절을 아예 잊고 살아왔다. 부모님 음력 생일도 챙기기 힘든데, 명절이야 말해야 무엇하랴. 그런데 참 묘한 일이다. 잊혀진 그 낱말 속에서도, 언제부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단단히 가족 의식으로 굳혀진 한 날이 있으니, 바로 동짓날이다.

팥을 끓여서 첫물은 버리고 다시 몇 시간 동안 푹 퍼질때까지 삶았다가, 큰 주걱으로 눌러서 체에 받쳐 내린다. 곱게 내린 팥물에 익반죽한 쌀가루를 새알처럼 둥글게 굴려서 넣어 한소끔 끓인 후,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다. 그렇게 혀가 데일듯 뜨거운 팥죽을 호호 불어가며 한 그릇, 두 그릇 비우다 보면, 춥고 긴 겨울 밤이 어느새 훌쩍 지나간다.

최근 나는 우리 아이들이 추석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는, 왜 내가 이 동짓날만 열심히 챙겨왔지 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한 동짓날의 기억이 있었다.

아이들 일곱을 데리고 매년 전세집을 전전하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은행 대출이라는 것을 받아서 말 그대로 쓰러져 가는 낡은 초가집 한 채를 샀다. 시커멓게 그을린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호롱불에 흐릿하게 잠긴 방 두개와 사랑채, 흙과 자갈이 가득한 마당 한쪽에 서 있는 녹슨 펌프 우물 하나, 변소라고 불리는 양쪽으로 나무판자가 깔린 구덩이, 흙인지 벽돌인지 알 수 없는 뭔가가 떨어져 나간 벽들, 그리고 당장 거름으로 써도 될 것 같은 더러운 이엉을 엊은 지붕.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집을 고치고, 단장하고, 하얗게 칠을 했다.

그 날은 분명 동짓날이었다. 할머니가 뿌린 팥죽이 사랑채 하얀 벽 위로 흐늘거리는 낙지 발들처럼 검붉게 흘러내린 것은. 그것을 본 엄마는 무쇠솥에서 끓던 팥죽을 휘젓다 말고 얼른 사랑채 쪽으로 내달려가 할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고 어무니, 왜 허연 베랑박에다가 죽을 뿌리쌌소잉. 애들 아부지가 얼마나 고상해서 뺑기칠을 해놨는디 이른 당가요. 그만 흐씨요 어무니 잉.

할머니의 고함이 억센 손에 들린 팥죽 그릇으로 튀었다.

우리 손주들 잘되게 해 달라고, 모든 악귀 다 물러가라고 지금 액땜을 흐고 있는디, 니가 멀 안다고 나를 막아스냐잉! 동짓날은 원래부터서 이렇게 흐는거시라!

할머니는 그 사이에도 얼른 다른 쪽 흰벽에다가 팥죽 한 숟갈을 흩뿌렸다. 이번에는 쭈꾸미 같은 자주빛 팥죽들이 쫘악 퍼졌다. 복을 비는지 악귀를 물리치는 것인지 뭔가를 중얼 중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의 작은 얼굴이 애원하는 주름으로 가득찼다.

아이고 엄니, 그르지 마씨요잉, 제발. 애들 아부지 고상흔걸 생각해서라도…

할머니는 악에 받힌 듯한 소리를 지르며 아직도 뜨거운 팥죽 그릇을 흙투성이 마당에다 패대기 쳤다. 동시에 엄마가 마치 하이에나의 발톱에라도 걸린 듯 할머니의 투박한 팔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이 갑작스런 소란에, 따끈한 동짓죽을 기다리던 우리들은 일제히 사랑채 쪽으로 달려갔다. 술이 들어간 할머니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듯 보였고, 엄마보다도 훨씬 컸다. 나를 그리도 예뻐하는 할머니 였지만, 고약한 술은 유독 엄마만 못살게 굴었다. 울부짓는 일곱 아이들과 할머니의 패악스런 고함에 이웃집 귀자네 까지 와서 할머니를 뜯어 말렸다.

이 일방적인 싸움은, 아버지가 퇴근을 해서 집에 오고서야 끝이 났다. 늘 그렇듯이 목소리 마저 큰 할머니의 넋두리가 기선을 잡았다. 아버지가 이유도 묻지 않고 엄마의 체념한 침묵에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서야 할머니는 만족해 했다. 효자 아버지는 한없이 어두운 얼굴로, 할머니는 먹이를 잡은 포획자의 당당함으로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았다. 장작불 앞에서 아무 말 없이 팥죽 열 그릇을 가지런히 퍼 담는 엄마의 묵직한 설움이 무럭 무럭 올라오는 김 사이로 뜨겁게 떨어졌다.

몇 분전의 공포와 혼돈은, 달짝 지근하면서도 뭉근한 팥죽이 입에 들어가자 마자 금방 게걸스러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늘 먹던 쉰 꽁보리밥이나 풀떼죽 대신에 상에 올라온 팥죽은 우리 모두가 1년 내내 기다리던 별미였다. 죽 한 그릇을 빨리 비우는데 있어서, 혀가 데는 것 쯤은 그닥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엄마, 좀 더 줘. 엄마, 나도 더. 나도. 엄마, 나도 더. 나도 한 그릇 더.

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이, 거침없이 빈 그릇을 내미는 어린 팔들 사이로 밝아졌다. 먹성 좋은 아이들을 바라 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늘 저랬다. 관청 소사로 온갖 잔심부름이며 더러운 곳 청소를 도맡아 하는 아버지의 유일한 자존심은, 일곱 아이들을 먹여 살린다는 그 것 하나에 있었다. 종일의 노동으로 지치고 허기진 아버지의 숟가락은, 자식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배부르다는 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진즉부터 입에 남은 쌉쌀한 팥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때 까지 혀를 다시며, 어떻게 하면 죽 한 그릇을 더 먹을 수 있을지 애써 작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내뱉어야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 그렇게 먼저 불러야 하는데, 그 말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입에서 소리로 만들어 지지가 않았다. 젖을 떼기 전부터 나를 키워준 할머니 앞에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나에게 여전히 너무나 어려웠다. 그건 할머니에 대한 배신이나 다름없는 것만 같았다. 저기요, 하고 불러볼까. 그러고 나면 뭐라고 해야하지. 죽 한 그릇 더 주세요. 아니, 그 말은 모르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 같아. 죽 한 그릇 더 줘. 아냐, 그렇게 친한 척은 평소에도 해 본 적이 없는걸. 너무 맛있어, 나도 더 줘. 그 말은 너무 길어. 너무 맛있어. 더 먹고 싶어. 나도 한 그릇만 더.

생각 없이 나와야만 하는 그 말을 어떻게 입밖에 내야 할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든 형제 자매들이 두세 그릇을 먹어 가는데도 내 죽 그릇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 눈과 빈 죽그릇을 본 순간 이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아야, 다섯째도 한 그릇 더 줘라 잉.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눈을 내리깔은채 말했다.

엄니, 지가 먼저 말하게 냅두씨요. 별로 안 묵고 싶은 갑지요 뭐. 지가 배가 고프면 왜 달라는 말을 안 흐겄는가요잉.

할머니는 금새 핏대를 올렸다.

쟈가 시방 묵고 싶어도 달라는 말을 못해서 암말도 안허고 있는거시여.

엄마는 애써 조심히 말했다.

어무니가 맨날 쟈를 감싼께, 쟈가 말을 한마디도 안흐지 않는가요 시방. 지가 묵고 잡으먼 지 스스로 말을 해야지, 그걸 맨날 어무니가 대신 흐먼, 쟈는 언제 한 번 말을 한당가요잉.

나는 괜시리 목이 메여서, 반찬이라곤 유일한 허멀건한 김치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들 더 먹는걸 왜 야만 안 먹고 싶다냐! 에미가 돼 갖고서, 자식 맴을 딱딱 알아서 줘야지, 그것도 몰라주고 달라는 말을 안한다고 안 줘, 시방! 니가 에미가 맞냐잉! 이 벵신같은 것이!

아귀들린 듯이 움직이던 여섯개의 팔이 일순 뻣뻣해졌다. 또 시작인가. 아버지의 불편한 헛기침이 팽팽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오자, 엄마의 작은 입이 꽉 다물어졌다. 아버지의 움푹 들어간 눈이 부리부리 하게 불을 뿜으며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엄지 손가락이 없는 왼손을 몸빼 바지 밑으로 슬그머니 집어넣고, 오른손으로 내 그릇에다 팥죽 한 국자를 퍼넣어 주었다.

나는 팥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한 향기는 한 없이 좋은데, 물컹한 팥죽을 삼키는게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들었을까. 엄마의 늘어진 삼각형 눈두덩이가 따가워서 그리고 끝내 내 입에서 나오지 못한 엄마 라는 말이 목에 걸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줄창 그릇만 보면서 한 모금씩 넘겼다. 하지만 여섯살의 허기진 배는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금새 잊어버리고, 김이 나고 눈치가 서린 팥죽도 한없이 맛있기만 했다.

할머니가 뿌린 그 팥죽은 정말 악귀를 쫒아 냈을까…?! 엄마가 젖은 걸레로 벽을 문지르고, 비바람이 세차게 벽을 내려쳐도, 그리고 우리들이 건강하게 쑥쑥 커가는 그 사이에도, 사랑채 흰 벽의 검붉은 그 팥죽 자국들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 좀 더 줘요. 엄마, 나도 더. 엄마 엄마 나도. 나의 아이들은 일년에 한번 먹는 이 동짓죽 맛을 잊지 않고 한 그릇을 금방 비워낸다. 애들아, 엄마 엄마 자꾸 부르면 엄마 이름이 닳아지니까 그만 좀 불러라. 나의 나무람에 아이들은 뭐가 우스운지 키득거린다. 이름이 닳는대.. 헤헤헤 이름이 어떻게 닳아 큭큭큭… 천천히 불어가면서 먹어라. 나는 아이들 그릇에 또 팥죽을 담아준다. 그리고 내 빈 그릇에도 듬뿍 한 국자 떠넣는다. 너도 많이 먹어라.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많이 힘들었지?! 정말 고맙다, 이렇게 잘 살아와줘서….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애들아, 옛날 옛날에, 이 검붉은 팥죽을 보면, 나쁜 악귀들이 얼른 도망을 갔대. 그래서 이걸 먹으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대…. 끝.


당선 소감

어렸을 적 늦게 배운 말 때문에, 커서도 실수가 잦았을 겁니다. 입 밖으로 내는 말은 한없이 더디고 눈치도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서만 무성영화처럼 맴돌 때가 많았습니다. 그 필름들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글로 써내려 갈 때면, 제가 가진 한계 안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쓰던 글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미지의 파동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랍고 한편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제 필명을 처음으로 불러준 재독한인문화예술협회에 감사드립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소리 없는 몸짓이나마 의미 있는 그 무언가가 되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한수

1199호 22면, 2020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