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휴양지, 비스바덴
슈바르처 복(Schwarzer Bock), 온천(Therme) 호텔 이야기

재독화가 황수잔

1800년전 로마인들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비스바덴에 정착하면서 이곳에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원천지를 발견했다. 목욕을 즐기는, 목욕문화가 발달한 그들은 이곳에 빌라를 짓고 살았으며 고품격인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Therme)을 지어 온천욕을 즐겼다. 원천지(Kranzplatz)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는 Mauritius Platz까지 흘러들어갔다. 지금의Langgasse와 Kirchgasse는 당시 로마거리였다.

로마역사가 Gaiusplinius는 “Mattiaker 인들이 살았던 이곳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3일마다 끓어 솟아오른다.” 라고 서술했다. 100년이 지나 프랑켄(Franken)인들이 정착해서 살았다.

1486년 온천장이 있던 이곳에 ‘슈바르처 복'(Schwarzer Bock)온천여관이 탄생되었다. 복은 주인이름이고 슈바르처는 성이다. 주인이며 시장인 Philipp zu Bock은 검정머리라서 사람들은 슈바아르처 복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관 수입을 위해서 당시 대중 교통수단이였던 말을 위한 말욕탕도 설치했다.

16세기 비스바덴은 화재로 많은 집들이 불타버렸고 여관도 파괴되었다. 1578년 von Hermann Burg가 이곳에 다시 온천여관을 지었다. 30년 신구종교전쟁으로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등 각나라에서 온 카톨릭인들이 여관에 머물면서 거칠게 사용했기 때문에 여관은 많이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나 비스바덴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당시 그들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거리에는 강간, 약탈, 절도 등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복여관은 오랜 기간 문을 닫았다. 당시 Johannes백작은 복여관을 경영하지 않으면 시에 소속 된다고 주인에게 경고하였다. 1622년 여관은 다시 복원하여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나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 군대들이 이곳을 점령했으나 Johannes백작은 견고한 성을 쌓아 성문을 지키도록 해서 비스바덴을 무사히 지켰다. 그가 죽은 후 1677년 30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가는 다시 복구하였고 ‘복’ 여관은 온천 여관리스트에 가입했다. 1712년 여관은 새롭게 재건축했다. ‘Rindsfusses’여관을 매입해서 이름을 ‘Englischer Hof’’라고 지었다. ‘

복여관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726년 2인의 온천전문가를 고용해서 청결과 시설을 맡게했다. 1736년 복여관은 유서 깊은 고품격을 갖춘 베스트 온천여관으로 선정되었다. 인근의 8개의 온천여관에서 원천지에서 솟아나는 온천수(Kochbrunnen)를 사용하는데. 행정은 장미여관과 복여관이 맡았다.

온천수의 온도는 65도로 매우 뜨거웠다.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여러 가지 질병들을 고친다는 광물질인 아연, 유황, 라듐 등이 들어있다. 온천수는 비스바덴 자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인츠, 프랑크푸르트 등 외부지역까지 운송하는데 이튼날 그곳에 도착하면 온천수는 목욕하기에 적당했다.

1818년 주인이 죽자 복여관은 그의 부인이 4년을 경영했고 사위인 Christian Bauer가 여관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는 우체국 비서로 여관주인이며 와인 판매를 했다. 헤센 나사우(Nassau)정부에서 말욕탕 시설 요청에 의해 말욕탕을 시설했다.

1834년 복여관을 Rudolph부부가 매입했다. 1860-61년 Rudolph딸이 경영하면서 47개의 방을 늘렸다. 매일 50명 이상의 온천손님들이 찾아왔다. 손님들은 이곳에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온천욕을 즐겼다.

일본에는 온천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야외온천장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연속에서 온천욕을 즐기면서 명상에 잠길 수있는 온천장이 많다. 등산가들이 많이 모여드는 일본 후지산 산자락 하꼬네에 분위기 있는 온천여관들이 많다. 필자부부도 다녀왔는데 온천수는 거의 65도나 되어 무척 뜨겁다. 나무들이 울창한 자연 속에서 바위로 둘러쌓인 뜨근 뜨근한 온천에 몸을 담그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독일인 남편은 온천문화가 생소해서 그런지 발을 살짝 물에 담가보고 너무나 뜨거워 찬물을 향해 달려가고 다시 오고 반복하다가 온천욕은 끝났다.

복여관에서 머물었던 독일시인 괴테는 “온천욕은 세상의 잡념을 잊게 하고 명상 속에 삶의 활력과 새로운 창조를 표출하게한다.”라고 했다. 1865년 여관 관리자였던 Theodor August Schaefer가 주인 딸과 결혼하면서 경영주가 되었다. 1899년 그는 이웃에 있는 ‘zur goldenen Kette’ 여관도 매입해서 넓게 확장했다. 당시 온천여관들은 같은 시기에 지어서 낡고 퇴색했다.

슈바르처 복 온천여관은 재건축하여 화려하고 고품격인 여관으로 탄생하였다. 온천 붐이 일어나면서 유럽 곳곳에서 부유한 상류층 귀족들이 휴양지 비스바덴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류층 귀부인들의 결혼조건에 비스바덴 휴양지를 1년에 한번은 혼자서 자유롭게 방문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비스바덴이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거리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상가들이 들어섰고 주택가에는 바로크양식인 우아한 빌라들이 건축되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요양소 쿠어하우스(Kurhaus)를 건축했다. 쿠어하우스에는 고급스런 카지노도 설치했다. 지금도 카지노에서는 부유한 상류고객들이 모여 롤렛(Roulette)으로 도박을 즐긴다.

당시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가 3천 Goldrubel를 잃고 다시 도박하기 위해서 도박자라는 ‘Der Spieler’ 소설을 26일간에 완성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쿠어하우스 주위에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카페가 들어섰다. 비스바덴은 풍요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슈바르처 복’ 여관이 호텔이 되면서 전기를 시설하고 층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편리하게 되었다. 220침대가 있는 초현대식으로 재건축된 대형호텔에 그전의 유일한 공중욕탕대신 층마다 욕탕시설을 설치했다. 고급스럽고 편리한 호텔 하루 숙박료는 단지 5마르크로 저렴하기 때문에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1906년 16곳에서 솟아났던 온천수를 한곳에서 솟아나게 했고 설치한 시가에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했다. 명칭을 “Drei Lilien Quelle”라고 했다. 1911-12년 Schaefer는 지붕위에도 더 많은 방들을 만들었다.

1차세계대전후 1919년 비스바덴은 다시 온천 붐이 일어났다. 당시 온천손님 일기장에서 “새벽6시가 되면 모든 거리거리마다 수많은 온천손님들이 물밀듯이 비스바덴 온천장을 향해 오고있었다” 라고 썼다. 1927년 처음으로 ‘Schwarzer Bock’ 호텔 간판을 걸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상층이 파괴되었다. 1951년 고전적이였던 외관을 단순하고 현대적으로 재건축하였다. 1, 2층은 아직도 당시 화려한 외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호텔입구에 들어서면 곳곳에 전통적인 고풍의 중세 가구들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아름다운 방은 Ingelheimer Zimmer이다. 천정은 르네상스양식으로 로맨틱하게 장식돼있고 곳곳에 놓인 16세기 가구들로 중세 분위기가 더한층 고조된다. 고품격 페르시아 양탄자를 깔아 로맨틱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실내장식을 위한 모든 가구들과 장식품은 Schaefer가 현지에서 직접 구입한 것이다.

호텔바 입구 상단에 당시 여관으로 시작할 때 쓴 글인 1486년도가 보인다. 지하창고에서 3세기 양식인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벽돌, 묘비, 온돌조각 등을 볼 수 있다. 1987년 Frans Pieter de Rooy(암스텔담 출신)가 ‘슈바르처 복’호텔을 매입하고 Winfried D.E. Voelcker가 세를 내어 경영하다가 호텔이 대단한 가치를 알고 매입했다.

‘복호텔’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세계적인 최상급호텔 그룹 멤버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방콕에 있는 ‘Oriental Hotel’이 같은 그룹이다. 1995년 슈바아쩨 복 호텔은 Radisson SAS호텔 계열에 들어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적이고 최상급호텔 별5 그랜드호텔이 되었다.

성공한 사람마다, 유명한 유적지의 화려한 명성 뒤에는 그 가치를 알고 보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유서 깊은 건물인, 미래를 디자인한 ‘슈바르처 복(Schwarzer Bock)’ 호텔이 수차 파괴되었으나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경영주가 수차례 바뀌면서도 변하지 않고 이곳을 지켜낸 투지와 신념이 과연 놀랍다.

북쪽의 니스라고 불리우는 휴양지 비스바덴(Wiesbaden)

비스바덴은 풍광이 아름다운 온천휴양지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추억들을 간직한 이곳에 황제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머물다 간 북쪽의 니스라고 불리우는 휴양지였다. 기원전 3000년 처음 켈트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살았고 마티아칸 독일인들이 이주해서 살았다.

목욕을 즐기는 로마인들이 정착하면서 이곳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온천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곳에 빌라를 짓고 온천 공중목욕탕을 지어서 온천을 즐기면서 살았다. 지금도 그들이 살았던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있다.

100년이 지나 프랑켄(Franken)독일인들이 정착하면서 살았다. 당시 칼 대제는 유럽반인 영토를 넓힌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황제였다. 서기 828년부터 이곳을 ‘비스바덴’이라고 불렀다. 칼대제는 대부분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휴양지 비스바덴에서 지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요한네스베르크는 추운 겨울이라도 토지가 항상 따뜻해서 리슬링(백포도주) 와인재배하기에 적당한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포도원재배를 했다. 요한네스베르크는 은은한 향기와 달콤한 맛을 지닌 독일에서 최상급 리슬링 와인 생산지가 되었다.

13세기 부터 이곳은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1547-1561년 도시가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30년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으로 수많은 살상이 벌어졌고,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1690년 당시 인구는 약 730명 정도였다. 18세기 비스바덴은 Fuerstentum Nassau가 되었다.

비스바덴은 휴양지로 카이저, 부유한 상류귀족들이 이곳에서 지냈다. 거리마다 화려한 상가들이 들어섰고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양식인 빌라들을 건축했다. 1800년부터 100년의 긴 세월 동안 온천 붐이 지속되었다. 1905년 비스바덴 인구는 10만명인데 20만명이 살고 있었다. 그중 10만명은 온천휴양지 방문객들이였다고 하니 당시 온천 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13년 건축된 고대 로마의 공중 목욕탕(Irisch-Roemisches Therme, Langgasse 38-40)은 당시 황제, 왕들, 부유한 상류귀족들이 즐겼던 온천장이다. 웅장하고 우아하고 고풍적인 온천장은 당시 로마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사우나 종류도 많다. 건조한 사우나, 수증기 사우나등, 90-100도의 무척 뜨거운 사우나도 있다. 뜨거운 물이 샘에서 콸콸솟아 오르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조용히 명상하는 곳도 있고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는 카페도 있다. 남여 공동 목욕탕으로 주로 성인 유럽인들이 온다. 아시아인들도 가끔 보이곤 한다. 분위기가 엄숙하고 조용하다.

황제의 온천장 이름인 “Kaiser-Friedrich-Therme”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온천이라는 뜻이다. 프리드히 황제는 황제로 즉위하고 99일 후에 죽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 99프리드리히 카이저” 라고 불렀다. 아들 빌헬룸 황제 2세가 즉위하면서 전통적인 로마온천장으로 찬란한 예술적인 장식으로 건축하였다. 1999년 복원한 우아한 Irisch-Roemisches의 공중목욕탕과 여러 종류의 사우나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다.

우리들 부부는 추운 겨울이면 이곳에서 가끔 온천 공중목욕탕을 즐긴다. 사우나 마다 돌고나서 마지막으로 수증기 사우나로 들어간다. 뜨거운 열기를 찬물로 씻고 나서 뜨근 뜨근한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그면 심신이 피로가 좍 풀리면서 세상의 잡념을 잊게 하고 명상 속에 삶의 활력과 행복감에 젖어든다. 온천수는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여러 가지 질병들을 고친다는 광물질인 아연, 유황, 라듐들이 들어있다.

1207호 20면, 2021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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